신앙과 거듭남(새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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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거듭남(새삶)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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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새삶 대화의 장"6월18일 시민선방




사회 " 진산 김관도 (새삶회 부회장)
새삶회 " 우산 최희공 (새삶회 회장)
원불교 " 홍원정 교무(대치교당)
불교 " 유수스님 (정토회법당 원장스님)
개신교 " 지승원 목사(한국신학원원장)
천주교 " 한미숙 자매(천주교마리아사업회실장)

▲ 사회자 반갑습니다. 우선 이 모임을 주최한 새삶회와 이 자리의 성격에 대해 회장님께서 한 말씀 해주시죠.
▲ 최희공 새삶회는 국민과 세계 인류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새삶을 개척하고자 만들어진 단체로 새마음 새몸 새생활로 새사람되어 새가정 새나라 새세계를 이루고자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각 종교 단체마다 새삶의 의미를 갖고 있고, 또 각 종교에서 말하는 새삶이 일면 상통하는 점도 있을 것 같아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날 땅에 떨어진 인류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시작은 이런 작은 모임과 대화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회자 불교에서는 어떻게 표현되고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이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 한미숙 천주교에서 이뤄지는 7가지 성사(거룩한 집행)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세례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통해서 다시 태어난다고 얘기합니다. 전에는 묵은 사람이었다면 이제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에서 세례성사를 받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도 세례 성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나 하느님에게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천주교도라면 누구나 치러야하는 과정입니다.
▲ 사회자 그렇다면 세례라는 행위가 이전의 삶과 새로운 삶을 구분 짓는 절차라고 할 수 있겠군요.
▲ 한미숙 그렇습니다.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계기가 되고 외양적으로도 하나의 표식이 되는 것이죠. 누군가 천주교인이 되었을 때, 외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례성사를 받았는지 여부가 필요한 것이죠. 아주 기본적인 의미이면서도 꼭 필요한 것이지요.
▲ 사회자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세례 받기 전의 상태와 받은 후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달라지게 됩니까?
▲ 한미숙 천주교식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은총’, 즉 특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오게 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표현할 수도 없지만 세례를 받는 순간 그 사람에게 은혜가 내려지기 때문에 세례 받은 사람은 변화하게 되는 것이죠.

▲ 지승원 한미숙 자매님께서 가톨릭의 교리를 그대로 말씀해주셨는데, 분명 세례에는 그런 의미가 있고 또 당연히 그런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신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교리를 떠나 성서에 나타난 새삶을 이룩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최초의 사람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거듭남은 ‘들음(聞)’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너의 본토를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그 말씀이 시작이었죠. 들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출발을 했고, 그 후 아브라함은 많은 힘든 일을 겪고 「믿음으로 의롭다」는 성경 표현대로 되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초의 발단은 역시 ‘듣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의 경우에도 성전에서 안개같은 현상과 함께 흘러나온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늘 기뻐하는 자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기독교 박해자에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최초의 사건 역시 “바울아 바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들음’에서부터 의문이 풀리고, 의문이 풀리면 자기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가 더 이상 들지 않고 확신을 얻게 됩니다. 물론 그 후로도 채워야하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그 들림의 원천이 어디냐?”하는 질문이 따를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여깁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이 거듭남의 최초 발단이 되는 것이지요.
▲ 홍원정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식을 통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때 의식은 종교적인 의식일수도 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는 스스로, 눈뜸에 의해서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9인 제자들이 목숨 건 기도로 혈인이적을 나투었을 때, 아홉 제자에게 법명과 호를 주시며 “전의 이름을 가진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 …새사람으로 태어나 창생을 위해 사(私)없이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새로 태어남의 최초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대종사)만이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한 합일이요, 믿음을 통한 합일입니다. 온전한 새로 태어남이라는 것은 진리에 합일하여 그 합일된 상태에서 새삶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자 홍원정 교무님께서 원불교 초기 교단사의 새삶의 이적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원불교에서는 입교를 하면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로 법명을 줍니다. 천주교의 세례명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 한미숙 제 경우, 두 개의 세례명이 있습니다. 저는 Focolare(포콜라레) 운동과의 만남을 통해 새삶을 얻었다고 느낍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미사에 참석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만, 성당 밖을 나오면 잊어버린다”고요. 제가 처음 이 운동을 접했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살고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점이 제게는 특별했고, 저역시 말씀을 살기 시작했을 때 제가 변했습니다.
▲ 홍원정 ‘말씀을 산다’고요?
▲ 한미숙 예, 말씀을 산다고 표현합니다. 지 목사님께서 들음으로써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셨는데, 저는 직접 그 말씀을 삶으로써 그분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도 저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살기 시작하면서, 실천에 옮기면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항상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포콜라레 운동의 창설자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제가 새로 태어났음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저의 이런 열정이 식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어나갈 수 있도록 제게 새 이름을 하나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요. 그 때 받은 새 이름이 코린(불타오르는 마음-이탈리아어)입니다. 그리고 이름과 함께 “(하느님께서) 너에게서 모든 것을 다 거둬가시고 단지 사랑의 불타는 마음만을 남기기를 바라라”는 편지를 주셨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제 나름대로 가졌던 개인적인 계획, 생각들, 자아가 무너질 때 사랑을 느낍니다. 제가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하느님이 제 안에 자리하심을 느끼는 거죠.
▲ 최희공 세 분의 말씀 들으니, 차이도 있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첫째는 어머니 태중에서 나온 그대로 살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사는 것인데, 새롭게 산다는 그 의미는 종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요. 어떠한 형식이 아니라 우리 몸과 마음을 통해 진리가 새롭게 살아날 때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대종사님 제자들의 나를 죽이고 창생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이나 과거의 나는 하느님이 거둬가 버리고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이 살아났다는 것이 모두 새롭게 살게 됨을 말하는 것이지요. 새롭게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은 바로 내 마음을 통해 진리가 새롭게 살아났다는 것이요, 여기에는 반드시 계기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과거의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욕심이 죽어버리고 새로운 진리로써, 성령으로써, 불변의 법칙으로써 새로운 삶이 내 자신을 통해 태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을 통해 결국 행동으로 발현되는 것, 이것이 바로 새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만난다고 하는 것은 만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남으로써 내 몸을 통해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런 맥락에서 공통적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 사회자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거듭 태어남, 다시 태어남의 의미는 갖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유수 스님께서 조금 늦게 오셨는데, 이제 불교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불교 전체의 개념과 스님의 개인적인 체험에 바탕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 유수 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깨닫는다’, ‘부처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인연을 통해 육신이 태어나고 새로움을 발견함으로써 정신이 태어나게 됩니다. 저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눈뜸이 곧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이냐? 사물에 대해 부분적이고 일면적으로 판단하는 것, 이데올로기와 종교, 성별, 계급 등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키가 크다거나 작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키가 크고 작고는 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해서 크거나 작은 것이지, 그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사물에 대한 통찰과 전체적 시각을 갖는 것, 저는 이것을 바로 ‘깨닫는것’ 또는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육신의 나로부터 정신의 나를 향해 가는 것이지요. 정신적인 존재일 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어 자기 역할을 갖게 됩니다. 거듭 태어남이란 정신적 존재로서의 자리매김이라 생각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며 사실 그대로를 엮어 간다면 우리 종교인들이 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사회자 지금까지 각자 신앙적 측면에서 새삶의 의미를 돌아보았습니다. 이제 주제를 조금 바꿔 이야기 나눠 봅시다. 우리가 육신으로 태어나는 것은 생일이라고 하는 특정한 시각이 정해져 있어서 되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입교 또는 세례를 통해 거듭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 이후에 오히려 퇴보하기도 합니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퇴보없는 새 삶을 이어갈 것인지 얘기해봅시다. 종교의 수행에 관한 이야기가 되겠군요.
또 하나, 아직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깨어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 한미숙 제가 ‘말씀을 산다’고 했는데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늘 노력해도 부족함이 있기 마련합니다. 저희 포콜라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가지씩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2001년 6월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입니다. 항상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살 때 저는 또다른 예수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혼자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사는 사람들끼리 한달에 한 번씩 모여 어려운점 실패한 일 성공의 체험담을 나눕니다. ‘나도 저런 적이 있었는데’라고 공감하며 도움을 얻지요.
▲ 홍원정 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깨달음과 믿음 두 가지의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저는 믿음을 통해 거듭남을 향한 출발을 단행했습니다. 온통 바쳐 열정적으로 살다 어느 순간 ‘내가 지금 어디쯤에 이르렀는가’ 점검해보니 다른 것은 전부 스승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었는데 한가지, ‘깨달음’의 부분에서 양심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덕에 답은 아는데 실제 깨달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거든요. 그때부터 의심이 들었습니다. 나의 실상이 모두 허상이었음이 드러나며 두려워지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완전한 자기 없음을 통해 가장 절대자리의 진리, 법신불, 대종사님과 제가 하나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업을 가진 존재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제2의 의문을 갖게되고 두 번째 체험으로 외로움과 근본적 고독감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법신불 자리와 아무것도 없는 내 존재의 근원자리와 한가지 더, 마음작용하는 자리를 본 것입니다.
내가 본래 법신이고 동시에 우주 만유가 다 법신임을 알고 나니 삶 자체가 마음공부요, 내가 부처이고 네가 부처이니 항상 불공을 하는 것이지요.
▲ 지승원 종교의 근원에는 고독이 있습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치열한 절대 고독의 자리에서부터 종교를 탄생시켰지요. 우리 삶은 진리와 관계 속에서 흘러갑니다. 절대적 고독 속에서 불완전하나마 노력하다보면 거듭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미완인 채로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고 봅니다. 완결된 의미의 거듭남은 어렵지 않을까요. 모든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존재 할 것에 대해 의심없이 관통할 수 있다면 거듭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랑의 경우에도, 모든 존재에 대해 하나의 의심도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 한 사람도 제대로 모르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한 사람도 모르는 것은,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씩이나마 노력해간다면 되겠지요. 또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지요.
▲ 유수스님 선몽이든 악몽이든 꿈에서 깨는 것, 망상이나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깨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닫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관념의 장벽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이 바로 깨닫는 순간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 깨달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봉착합니다. 깨달음을 퍼뜨리는 것이 바로 새삶운동 영성운동 깨달음운동이지요. 남북 분쟁이나 부부싸움이나 모두 자각을 하지 못해서 발생합니다. 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저 사람도 따라서 볼 수 있도록 이끌어야지요.
▲ 최희공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하느님의 삶, 깨달음 자리의 삶을 살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무엇을 통해서’가 관건입니다.
내가 어떻게 깨달음으로 갈 수 있었는지 아는,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남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중생을 건지려는 마음이 생겨나고 스스로 수행의 삶을 살게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갈망과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새삶이 가능하겠지요.
우리 종교인들이 만나 공통적으로 어떻게 노력할 것인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해야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회자 진리에 대한 사랑은 진리와 합일, 수행으로 이뤄진다고 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외부를 향한 봉사,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 즉 실천은 종교인 각자가 해도 되지만 현대사회 특성상 특정 종교 혼자의 힘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일, 공동으로 추구하는 이슈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새만금간척사업이나 북한돕기, 사형제도 폐지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현대인의 공동 이슈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이야기 나눠봅시다.
▲ 유수 현대 사회는 크게 네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전지구적인 문제입니다. 환경에 관련한 것이지요.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자는 운동, 즉 열심히 일하고 적게 갖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인류가 안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생존권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생존의 위협은 받지 말아야지요. 기아 질병 문맹 퇴치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셋째, 평화운동입니다. 인종 민족 계급 성별 문화 종교 등 각종 갈등을 해소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넷째 수행운동입니다. 마음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로부터의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이 네가지 방향에서 종교가 연합한다면 큰 결실을 볼 것입니다. 과거 종교는 개인의 내면에만 집중하였고, 사회주의에서는 구조적인 문제에만 집중했는데 수행과 개혁은 더 이상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는 이제 과학으로 거의 규명되었습니다. 정신의 영역은 종교가 담당해야지요. 개방된 상태에서는 종교간의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지승원 스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산적한 문제를 두고 종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은 안될 일이지요.
저는 비극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봅니다. 서로 보고 듣게 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됩니다. 서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열린 사회가 된다면 새 사회가 되는 지름길이 열리는 셈이겠지요. 비극을 이해하는 길은 서로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 홍원정 원불교는 저희 교세 범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다른 종교든 단체든 좋은일에는 함께 하려고 합니다. 원불교 2대 정산종사님께서는 동원도리 동기연계 동척사업의 삼동윤리로써 하나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은, 하나임을 알고 하나이기 때문에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제라도 좋은 일 있으면 같이 하도록 합시다.
▲ 한미숙 아까 말씀 드렸듯이 천주교 안에는 자녀들이 많기에 사업도 다양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하느냐, 언제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느꼈을 때 바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요.
▲ 최희공 유수스님 말씀대로 빈곤 무지 질병을 모른체 한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육신뿐 아니라 정신의 빈곤 무지 질병이 더 심각한 현실입니다. 정신의 빈곤 무지 질병을 없애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입시다. 생활을 떠나지 않는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내봅시다. 종교인이 힘을 합쳐 인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참된 진리를 향한 열정을 불태웁시다. 서로 용기를 북돋우고 지혜를 합치고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도덕운동을 실천하고 계신 여러분을 보니 용기와 힘을 얻는 듯 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협력합시다.
▲ 사회자 지금까지 첫째, 각자 종교의 입장에서 새삶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둘째, 우리 삶에서 어떻게 하면 쉬지 않고 새삶을 이어갈 수 있으며, 새삶을 살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새삶으로 이끌것인가 셋째, 사회적 이슈와 관련지어 어떻게 새삶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 나누었습니다. 새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개개인의 삶의 향상과 더불어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공통의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대화에 참여해주신 데 감사드리며 이것으로 제2회 새삶 토론을 마칠까 합니다.
<정리: 이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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