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타원 박청수 교무 해외교화기, 강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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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타원 박청수 교무 해외교화기, 강남교당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7.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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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에 피는 은혜의 꽃



1937년에 시작되는 역사
1937년 9월 연해주 한인 지식인 2천5백여명이 소리소문없이 끌려가 총살되었다. 그리고 총171,781명의 한인들이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 스탈린의 폭거였다. 한인들은 농사지을 씨앗과 가재도구만 챙긴채, 화물차와 가축 운반 개조차에 짐짝처럼 실려 한 달여 간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60%의 아이들이 사망하고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가족이 생기기도 했다.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창고나 마구간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요, 대부분은 맨땅에 토굴을 파고 굴 속에서 겨울을 지냈다. 영하 40도가 오르내리는 겨울 그해만 5만여명의 한인들 굶주려죽고 얼어죽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 잊을 수 없는 한인들의 1937년이다.
그러나 그들은 봄이 되자 잘 챙겨 두었던 곡식을 일구었으며, 2차대전후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소수민족으로서는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 최고를 자랑하게 되었다. 한인들은 다시 러시아의 지식인 사회에 들어가, 전문직을 형성해가고 있다.

다시 시작되는 1937년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자 그들은 자국의 언어를 복원하여 자국내 모든 소수민족에게 자국어를 강요하였다.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족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시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다. 여기에다 대부분 회교도를 이루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이민족에게 폭력적인 압력을 가해왔다.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제 다시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때에 떠났던 연해주로 발 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엔 다시 추위와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청수 교무의 1937년
「우리 민족 서로돕기 운동본부」에서 1997년, 1937년 한맺힌 고통을 겪은지 60년만에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그날의 아픔을 회상하는 ‘회상열차’에 박청수교무도 몸을 싣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1937년생임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태어난 그 해에 저 연해주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버려져 한많은 죽음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박청수 교무와 연해주 한인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박청수 교무는 1995년 겨울의류 2트럭분을 모아 한국 마르카 명상회를 통해 연해주에 보낸 것으로 시작하여 1998년 5월 고려인재생기금회 김 텔미르회장을 통해 3천21만원을 보내고 98년 6월에는 의류5천여점을 모아 학용품과 함께 1컨테이너를 보낸다.
“물도 없고 식량도 없고, 당장 땅바닥을 가릴 장판이 없으니, 비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추운 연해주에 바람이 부는데 바람 가릴 유리창도 없다니, 어떻게 합니까. 장판이라도 깔고 유리창이라도 달아 바람을 막아야죠”

한글학과 개설
지난해 9월 박청수 교무의 열성에 힘입어 대한주택건설사업협회 박길훈 회장의 염원으로 이제 연해주에는 ‘고려인 우정마을’이 건립되었다.
박청수 교무는 지금까지 99년 7월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1천만원을 전달한데 이어, 2천년 1월 한인촌 주택지어주기로 2천3백여만원, 의류 1만6천여점, 올해 1월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한인 희생자 역사발굴작업으로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인호 이사장을 통해 1천만원을 후원했다.
“이 곳을 지속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곳을 지속적으로 도우려면 ‘우리의 민족문화를 이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해 한화중, 사진원 교무를 연해주에 보냈습니다”
한화중, 사진원 교무는 최근 프리모스키농업아카데미(PSAA:연해주 지역 국립종합대학으로 아카데미는 대학을 포괄하는 상위명칭, 프리모스키농업아카데미는 3개의 산하대학을 가지고 있다)로부터 한국어학과 개설을 허가받고 3년간 무비자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문화실을 만들어 한국문화를 연해주 고려인들에게 가르칠 예정이다.
한화중 사진원 교무는 말한다. “장기적으로 3가지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려인 정착을 돕는 것이고, 둘째는 한중러 한민족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 셋째는 북한 접경지역이고 북쪽 노동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북한교화의 관문으로 역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돕고 싶어도 어려웠는데, 이제 우리 교역자가 상주하면서 연해주 고려인을 직접 도울 수 있게 되었다”며 박청수 교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 “이 후배 교무들을 통해, 한국의 많은 독지가들의 손길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도하겠다”며 많은 분들의 관심과 합력을 구했다.
<박동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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