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회 여성회 월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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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여성회 월례회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7.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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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 은혜 갚으며…


이주실"연극인"58세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원불교 교도는 아닙니다. 가톨릭 신자이고, 지금도 가톨릭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방금 우리가 “은혜 사랑 자비 우리는 하나입니다”라고 노래 불렀던 것처럼 종교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 하나임을 압니다.
지난 1999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성지고등학교 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가끔 학교에서 기도를 한다거나 하는 종교의식을 할 때가 있는데 저는 그 시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교전도 읽어보았는데, 너무도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성지고등학교에서는 아침이면 늘 교무회의를 하는데, 선생님 뿐 아니라 허드렛일을 하시는 분들까지 모두 모여서 다함께 회의를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자꾸 보다보니 ‘우리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믿건 무슨 상관일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 학교에서 정말로 말 안 듣는 녀석이 있으면 오히려 제가 먼저, “얘, 학교에서 너희들에게 마음공부 시키지 않니, 마음공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마음공부 좀 해봐라”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 제게 어떤 아이는 “선생님은 나이롱 신자야”하기도 하구요. ‘날자 날자꾸나’연극 대본에도 ‘마음공부’라는 대사가 여러 번 나오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마음공부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네 마음에 어렵지 않고 까다롭지 않게, 생활속에 있는 이야기로 그 진리로 아이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지 느낄 수 있었거든요.

인연이란 저 일원상과 같아
99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는 줄곧 기숙사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만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부족함을 느껴 지금은 사회복지학을 공부중입니다. 학교가 청원에 있다보니, 요즘은 이름만 걸어놓은 채 성지학교 아이들을 못본 지 꽤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잠시 아이들에게서 떠나 있지만 오늘처럼 원불교 교도 여러분께서 이렇게 불러주시니 인연이란 것은 끊이지 않고 마치 저 일원상처럼 계속해서 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찾아오는 학부모도 없고, 자원봉사자 한 명 없는 성지고의 어려운 환경은 제가 보기에도 너무 측은할 정도입니다.영산은 서울서 가자면, 다녀오는데 1박2일은 족히 걸리는 산골입니다. TV를 켜면 줄이 가고 화면도 제대로 안나오죠, 핸드폰도 안터지는 곳입니다. 방마다 핸드폰 안테나가 뜨는 곳이 한곳 있으면 그곳에 핸드폰을 쭉 세워놓습니다. 그리고 전화가 오면 이어폰을 연결해 그 자리에서 가만히 전화를 받곤 하는 열악한 곳이지요. 그러면서 성지고등학교 아이들은 그곳에서 부족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갈망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만족스러움이 무엇인지 절제가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별연습
잠시 다른 얘기를 좀 할까요. 사실 저는 암 투병으로 인해 유명해졌습니다. 연극배우 더하기 암투병 환자로 유명해진 거죠. 그런데, 의사도 포기했던 저를 누가 살렸을까요?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자기일 해왔는데 암이라고 하니 안타깝다’며 각자의 종교 방식대로 열심히 기도해주신 분들, 그 기도하는 마음과 사랑을 받고 여러분들 곁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호주 겸 세대주로서 두 딸과 함께 지내던 8년전 어느날 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는 3기라고 진단했어요. 그런데 막상 수술하려고 열어보니 늑골과 임파선까지 암세포가 전이되어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치료받는 동안에도 너무나 악화가 급진전하는 바람에 병원측에서도 “어렵다”고 그러더군요.
8개월 정도 항암치료를 하다보니 몸도 너무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더이상 치료할 형편이 못되어 저는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을 차라리 아이들과 이별연습을 하는데 쓰리라고 생각했지요. 우선 두 딸을 캐나다에 있는 동생에게 보내놓고 제가 살아온 날들과 조금씩 이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암 환자한테는 왜그리 정보가 많던지, 뭐가 좋다더라, 뭘 먹고 효과를 봤다더라. 주변에서 끊임없이 치료법을 알려주더군요. 저는 그런 말에 동요되지 않고, -사실 좋다는 처방대로 약을 쓸 형편도 못되었구요- 수돗물을 끓여 컵에 담은 뒤 “이것이 내 약이다” 하며 마시고, 밥을 지어 첫 숟갈을 뜨며 “이건 암세포 너 먼저 먹거라. 이것 먹고 난동부리지 말고 말 잘 듣거라”, 그리고 나머지 밥은 모두 정상세포들이 먹고 “부디 암세포와 싸워 이겨다오” 했습니다. 그렇게 지냈습니다. 항암치료를 끝내니 우선 밥은 제대로 먹을 수 있겠더라구요. 그러면서 먹는 행복을 알게되었습니다.
암이라는 죽을 병에 걸린 것 자체는 절망이지만 내가 이제라도 먹는 행복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인 이주실과 배우 이주실이라는 두 이름을 가진 제가 세상을 마감할 때 어떤 이름으로 갈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어머니 이주실과 배우 이주실이라는 두 이름으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남겨줄 재산도 없고 아이들을 훈육할 방법도 없고 멀리 떼어놓았으니 살갑게 이별할 방법도 없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나는 죄인이다. 그렇다면 무슨 방법으로 죄를 갚을까.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우선 찾자’하여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연극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바로 연극무대에 올라 덕혜옹주, 만선, 마요네즈 ,이별연습까지 네 작품을 했습니다.

하룻밤 묵어간다는 것이 인연되어
성지고와의 인연은 그 즈음이었습니다. 연극 “이별연습”을 끝냈을 때 ‘여성의 전화’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국 13개 지역에 쉼터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을 좀 해줄 수 없느냐고요. 저는 흔쾌히 승락을 했습니다. 저는 “공연비는 안받겠다, 단 조건은 연극 공연하는 지역을 내가 선정하겠다”고 했지요. 저는 연극무대가 흔하지 않은 곳, 문화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곳을 골라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영산이었습니다.
그 때 성지고 선생님들이 마침 연극을 보시고는 “일부러 시간 내어 오기도 어려운 곳이니, 이왕 온 김에 하룻밤 묵으며 성지고 아이들에게 좋은 말씀이라도 들려주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기로 하고, 영산 성지고로 가서 하룻밤 잤습니다. 영산의 낙엽지는 풍광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꿈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6시에 종이 울려 깼는데, 저절로 무릎꿇고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더라구요.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교실에 들어가서 보니, 아이들 머리색깔은 빨주노초파남보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더라구요. 게다가 다리 떨죠, 손 떨고, 머리 떨고, 화장하고 있는 아이며 정말 그런 모습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얘네들 앞에서 무슨얘기를 할까 순간 막막해지더라구요.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말이 먹히질 않는 것이었어요. 다리는 갈수록 더 떨고, 아이들은 점점 더 산만해졌죠. “학교에서는 50분 강연을 부탁했지만, 난 오늘 20분만 얘기할 것이다. 이게 연극이라면 나는 실패한 배우다. 관객을 배우에게 몰입하도록 연기하지 못했으니 실패한 것 아니냐. 그런데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두고봐라. 꿈을 가져라. 꿈이 없으면 죽음을 기다리는 말기 암환자인 나만도 못하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부디 시간을 아껴써라”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학교를 나 올 때 제 속마음은 ‘짐 정리를 해서 아예 여기로 내려온다’ 그 생각이었습니다. 짐 정리를 마치고 교감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저 내려가려고 하는데, 먹여주고 재워만 주십사”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공들이면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지내오고 있습니다. 연극을 통해, 예술을 통해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나름대로 고민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연기는 했지만 가르쳐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방법은 몰랐거든요.
제 자식은 떼어놓고 살면서 남의 자식과 함께 지낸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그 때 제가 터득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공들이고, 덕 쌓으면 내 자식들에게도 누군가 사랑을 베풀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아이들을 위해 큰 일을 한 것처럼 칭찬하시지만, 오히려 저는 아이들을 통해 “참 괜찮은 아줌마”로 변모할 수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학습입니다. 어떤 본보기를 통해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심하게는 인간쓰레기라고 불리는 그 아이들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바로 어른들입니다. 그 애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나빴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무척 애정이 갔습니다.
저는 인생의 말미에 있고 이주실이라는 연극배우로서의 이름은 전국에 계신 여러분들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이지만 은혜를 갚자. 남은 기간을 바쳐 아이들을 진하게 변화시키면, 전통으로 대물림되어 이 학교의 아이들이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굉장히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날자 날자꾸나!
아이들과 ‘날자 날자꾸나’ 연극을 준비하며, 개개인의 몸가짐, 덧니가 있어 ‘ㅅ’ 발음이 안되는 아이, 정서가 불안해 예비발성을 하는 아이(말 더듬는 아이) 등 하나 하나를 전부 배역에 맞추어 대본을 썼습니다. 예를 들면, 정서가 불안해 예비발성을 하는 아이에게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대본을 쓰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던 아이들이 연극에 몰입하게 되면서 막 흔들던 몸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멈추게 되고, 잘했다는 칭찬에 더듬었던 대사를 제대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또 한번…’(김소월 ‘가는 길’) 대사를 낭독시키며, 그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 추억이 없는 아이들에게 그리움을 넣어주려 했습니다. “그립다. 그림.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움→그림→림→음→음마→엄마” 이렇게 말입니다. 박자도 호흡도 필요 없는 랩 세대이다 보니 시를 통해 박자감을 느끼게 하고, 또 그림도 그리게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평소에 쓰는 상스러운 말을 연극이 끝날 때까지만 하지 말아보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같이 시를 외웠습니다. 이 아이들은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실은 그리움이 맺혀 있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절제가 더 큰 사랑이고, 더 큰 것을 주는 것임을 배워가고 차츰차츰 달라지는 것을 느낄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과 연극을 하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주실, 네가 이름을 얻으면 더 얼마나 얻겠느냐, 기회만 된다면, 건강만 허락한다면 꼭 이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과 나누면서 살자”라고 말입니다.
누구를 돕는다 거나 나눈다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하건, 어떻게 나누건 간에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돈으로 돕는 것이고, 시간이 많은 사람은 땀과 노동으로 돕는 것이고, 저는 제가 일궈온 예술로 나누는 것이고, 또 여러분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불러주신 데 감사드리며 이상 마치겠습니다.
<정리: 이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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