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사회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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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사회교리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8.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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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이웃종교에서 배운다 ② 천주교의 사회교리


② 천주교의 사회교리

1987년 7월5일 경찰과 형사들의 삼엄한 미행과 감시 공포분위기에서 전국교구 사제들은 가톨릭센타 옥상에서 시위를 벌였다. (1) 천주교, 신부에 대한 감시와 미행, 연금을 중단해제 하라 (2) 대통령을 우리가 뽑자. (3) 통일 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거는 무효라고 사제들은 외쳤다.
다음날 문정현 신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은 성당의 창문을 부수고 문정현 신부와 함께 있
던 박종상 신부를 끌어내어 구두발과 주먹으로 한참이나 무차별로 짓밟았다.
이를 막으려던 문규현 신부가 구타당하고 박종상 신부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박종상 신부를 차에 태워가다 아스팔트 위에 버리고 갔다.
7월10일 밤 대책을 논의하던 강덕행 신부를 구타했고, 다섯 수녀의 머릿수건을 벗기는 만행
을 계속했다(문규현, 한국천주교회사3, 112쪽).

한국천주교의 성장과정
한국 천주교는 1945년 해방이후 미국 천주교회의 엄청난 액수의 구호물자에 의지해 구호기
관과 자선 사업기관을 설립하면서 급성장한다.
1945년 천주교의 신자수는 18만3천명(이중 5만명은 북한)이었으나 1955년 21만 5천으로 증
가하고 1960년에 와서는 45만 여명으로 증가한다. 이와 같은 천주교인의 증가를 천주교 측
은 시대 상황의 산물로 본다. 전쟁 이후 시중에 돌던 구호물자의 많은 양이 천주교회를 통
해 나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교자의 상당수가 구호물자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 증가율은 1958년 24.2%였던 증가율이 60년대 들어와 6.2%, 1970년에는
1.2%, 1971년에는 0.29%로 떨어지게 된다. 천주교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종교’로 다가서
지 못했다. 일제시대 교회가 친일의 길을 걸으면서 민족의 고통을 외면하자 민중도 교회를
외면한 것처럼 5~60년대 고난의 역사 가운데 교회가 고난과 함께 하지 못하자, 신도들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런 한국천주교가 전환을 맞은 것은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면서다. 원
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군사독재 정부에 항거하면서 유신헌법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지학
순 주교가 구속되자 김수환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우리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회의식
을 정말로 가졌는가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책임
을 다했는가를 반성하고 우리 주교들과 성직자, 평신자 모두가 이 기회에 자신의 신앙생활
을 깊이 반성해 보도록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고 했다.
각 교구의 사제단은 지 주교의 ‘양심선언’지지와 ‘지주교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전국
적으로 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같은 해, 9월23일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었다.
당시 한국인 평사제 639명 가운데 3백여명이 참여 했으니, 외국에 나간 경우나 직무상 문제
로 참석치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제들이 참여한 것이었다.
이후 정부에 맞서는 천주교 사제들을 향하여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계속된 구속과 미행, 구
타를 전국적으로 벌여 나간다. 이 가운데서도 천주교인들은 ‘순교찬미 기도회’를 열고 조
국을 위하여, 정의와 민주회복을 위하여 기도회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국선언과 구국선언을
계속했다.
천주교의 양심선언과 시국선언에 힘입어 74년 12월에는 재야 인사들이 결집되어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발족되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였고 이에 연류된 기자들은 자유언론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량 직장에서 쫓겨났다.
정부는 이런 시민운동 분위기를 좌경으로 몰아가고자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하여 1975
년 8월 사건 관계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 다음날로 전격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 시신마
저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화장해 버리려고 하자, 이 모든 과정에서 이들을 구하고자 애썼
던 사제들은 영구차 밑에 엎드려 영구차를 제지하려 했으나 경찰에 폭력적으로 진압되고 말
았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제들, 신부들에게는 경찰의 미행이 따르고 협박과 테러가 감행되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신부들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억울한 삶을 외면하지 않고 불의에
항거해 나갔다. 이런 천주교인들의 노력에 정부는 모든 언론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 종
교를 벗어나 정치에 간섭하는 ‘부당한 이들’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천주교인들의 정당한
노력과 진실을 아는 지식인들은 천주교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체제라는 억압적 상
황에서 천주교 성당들은 최루탄과 경찰의 진압부대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급격히 성장했
다. 1969년까지 78만 명에 이르러 정체하고 말았던 천주교회신자들은 1979년 125만 명으로
폭발적인 교세 증가를 이루었다. 교세 증가의 내용을 보면 주로 도시에서 증가했으며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층이, 여자 못지 않게 남자신자들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7~80년대, 아니
지금까지도 명동성당은 정의와 양심의 횃불이 밝혀지는 성소로 국민들에게 인식됐다. 민중
의 고난과 함께하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국민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이 얼마
나 지대한 것이었가에 대한 한 예를 들면, 1977년 3.1 명동사건으로 변호를 맡은 변호인 5명
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는 자리에서 전원이 모두 바로 입교하였다.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
가에 관계없이 한국천주교인들이 보여준 정의와 진실을 향한 올곧은 모습, 그것이 어떤 희
생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가난한 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하려는 천주교인들의
모습에 한국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천주교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서 광주민주화항쟁과 1982년 부산미문화원 사건, 그간의 수많은 사건들, 87년
6.29직선제 쟁취에 이르기까지 실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그 평신도
들의 고난과 희생으로 커왔다.
한국천주교인수는 1989년 261만 여명으로 급증했으며, 92년에는 3백만을 넘어서 한국 전체
인구대비 7%를 넘어섰다. 이것은 당시 빠르게 성장하는 다른 종교의 성장과 비교해도 2배
가 넘는 성장이었다. 한국천주교는 2천년 현재 4백만을 넘어서 우리 나라 인구대비 신자비
율 8.8%로 성장했다. 한국천주교인들의 신자구성의 특징을 보면, 신자들의 평균학력이 한국
인의 평균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고 전문직 관리직 종사자들이 전체 신자의 18%내외로 전국
평균치인 2.2%보다 월등히 높다. 또한 천주교인들의 월평균 소득도 우리 나라 월평균 소득
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오히려 천주교인들은 한국천주교가 중산
층화되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종교로 전락하지 않을까, 미리 경계하고 우려하며 더욱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의 성장원인
확실히 한국천주교의 급성장은 사회참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천주교는
사회문제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을까? 그들은 사회주의 사상이나,
무슨 민주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떤 근거에서 한국사회의 불의와 부조리
를 보았으며, 온몸으로 항거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교황
청의 가르침’에서 한국천주교는 급변했으며, 사회참여의 원리와 지침을 터득하고 받아왔다
고 할 수 있다. 가톨릭이 처음으로 사회문제를 교법에 입각해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레오13
세의 「새로운 사태」라는 문서며, 이것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인 영향력과 지침으로 채택
되어 세계 가톨릭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진행된 「제2차 바티칸 공
의회」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이 왜 사회문제를 교법에 입각해서 보기 시작했는지, 사회문
제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검토하기 위해
서는 가톨릭의 간단한 역사와 19세기 말 가톨릭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가톨릭의 위기
프랑스 혁명 당시 시민정부는 ‘사제의 시민헌법’을 제정하고 충성을 서약하지 않는 3~4만
명의 사제들을 추방, 처형한다. 1796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교황 비오 6세는 나폴레
옹에게 체포되어 처형된다. 이무렵 세계적으로도 가톨릭 신자수는 반으로 줄어든다. 가톨릭
역사에 이처럼 큰 위기가 있었을까.
313년 로마 제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가톨릭은 이후 서구 역사에 가장 지속적고 강력한
정치, 이념과 윤리,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가의 황제라고 하여도 민중의 문화와 생활
을 지배하고 있는 가톨릭 교황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토록 서구 역사에
지배적이었던 가톨릭과 교황이 민중에게 버림받는 것은 물론 가톨릭의 수반인 교황이 처형
까지 당하였으니 그 충격과 영향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가톨릭이 서구유럽으로부터 버림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서구는 변화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은 봉건체제를 급격하게 해체
시켰다. 봉건영주와 농노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변모했고, 황제는 시민혁명으로 무너져 곳곳
에서 입헌민주제가 등장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근대과학의 발달과 ‘이성’을 중심으
로 한 근대철학, 계몽주의와 근대 시민정치의 등장이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 2천여년 동안 유지되어온 가톨릭의 권위가 하
루아침에 무너지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가톨릭의 치명적인 붕괴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1891)라는
회칙은 ‘위기의 가톨릭’과 오늘날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가톨릭을 구분하는 분기점이 되고
있다.

새로운 사태
과학문명의 발달은 종교의 변화도 요구하였다. 세상과 담 싼 종교는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가 종교로서의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현실의 고난을 이해하고 그 고난을 극복
하는 과정으로 존재해야 했다. 그리고 현실의 고난은 과거와는 질을 달리 한다. 노동자, 농
민, 도시빈민들의 가난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 정치적인 구조에서 그 원인이 만들
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톨릭은 사회과학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갖게 되고 현실을 종
교적인 가르침에서만이 아닌 사회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이해하고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찾
게 된다. 도학과 과학이 병진되지 않고서는 종교가 그 시대적 사명을 잃고 말게 되는 것이
다. 그 처참한 위기 가운데 레오 13세가 발표한 「새로운 사태」는 당시 사회의 가장 민감
한 문제인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다룬다. 당시 사회는 정치 경
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여기서 가톨릭이 제시한 해결
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한편에 편향되지 않고 중도주의에 입각한 건강한 인류 발전에 초
점이 맞춰져 있다. 사유재산 문제에 대해 자본주의적 입장에서 개인소유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사회적 사용권을 강조한다. 재산을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자연법에 합당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특정 개인만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또한 고용주들의 유아노동, 장시간 노동, 여성노동에 대해서도 그 해악성을 경고하고
특히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이 불러들이는 죄악과 결과에 대해서도 경고
한다. 한편으로 노동자에게는 폭력투쟁을 일삼는 공산주의적 노동조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당한 노동조합과 충분한 협상을 가질 것, 최후의 수단으로 파업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
한다.

사회교리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가 발표되자 가톨릭 대학과 신학교들은 사회 교리에 대한 연구
를 가속화시켰고 「새로운 사태」의 가르침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
들에게도 널리 퍼져나갔다. 사회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원리가 점차 전인류의 공동 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비가톨릭적 서적이나 신문, 잡지뿐만 아니라 의회의 회의장과 사법부의
법정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원리로 자주 인용되고 변호되었다. 1차세계 대전 후 세계 열
강들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규정하는 원칙을 세울 때, 그 결론들은 대부분 레오 13세
의 원칙과 경고를 그대로 인용했다.
레오13세에 이어 가톨릭의 역대 교황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가톨릭적인 해결책을 계속 계승
하고 발전시킨다. 비오11세의 「사십주년」(1931), 비오12세의 1941년 성령 강림 대축일 메
시지,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1961), 「지상의 평화」(1963), 바오로 6세의 「민족들
의 발전」(1967), 「팔십주년」(19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및 선언문(1971), 요한 바
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1981), 「가정공동체」(1981), 「사회적 관심」(1987), 「백주
년」(1991) 등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전세계 2천여 주교들이 참석하고 이들의 실제적인 비판
을 거쳐 「교회헌장」과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을 선포하였다. 특히 「현대세계의 사목헌
장」은 현대세계의 특징을 사회과학과 가톨릭적 진리관에 입각해 파악하고 현대세계에 맞는
교화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몇가지 특징적인 것을 살펴보면, 종교와 생활의 일치를 강조한
다.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되는 잘못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종교 생활 때문에 현세 임무를
등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세 활동은 종교 생활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현세 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이하 인용은 『가톨릭 사회교리』, 가톨릭출판사)생활과 신앙의 일치를
강조한다. 평신도들의 교화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세속적 임무와 활동은 비록 독점적으
로는 아닐지라도 평신도들의 고유 영역임으로 사목자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거나 답하려
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독선적인 주장을 배격한다. ‘아무도 교회의 권위를
빙자하여 배타적으로 자기 주장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며 진지한 대화와 이해를 권고한다.
그동안 가톨릭이 세상에 저지른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며 신자들에게 정화와 쇄신을 권고한
다. 또 ‘교회는 교회를 반대하거나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의 반대에서도 많은 이익을 얻
었고 또 얻을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현대세계의 비판과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권고한
다. 학문 분야에서는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는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과학과 신앙
이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이며 병진될 수 있다고 파악한다. 가정문제에 대해 종교적 의미에
서 가정의 의미와 부부애, 출산, 자녀들의 적절한 성교육, 낙태문제 등도 지적한다. 사목 활
동에 다양한 학문을 권고한다. ‘사실, 과학, 역사학, 철학 등의 새로운 연구와 발견은 새로
운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이 새로운 문제들은 실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며 신학자들의 새로운
탐구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신학자들은 신학의 고유한 방법과 요구를 따르면서도, 언제
나 동시대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하기 위하여 보다 적합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요청받고 있
다. 사목 활동에 있어서는 신학 원리 뿐 아니라 세속 학문,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의 발견들
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용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신자들도 보다 순수하고 보다 원숙한 신앙
생활로 인도될 것이다’
노동문제, 정치문제, 경제투자 문제, 국제 공동체의 필요성, 군비문제 등 오늘날 현대사회의
문제에 그대로 이어지는 소소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현재 진행되는 상황과 가톨릭이 어떻
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톨릭적 입장에서 무엇을 지지해야 하는지, 너무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각국마다 각 나라의 말로 미사를 볼 수 있게 되었으
며, 평신도들의 교화자로서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한국천주교로부터 배울점
1919년 소태산 대종사는 9인 제자들에게 생명을 건 기도를 올리게 한다. 창생구원을 위해서
는 죽어도 한이 없다는 서약아래, 몇 달간의 정성스런 기도를 올리고 끝내는 자결하기로 하
였으나, 서약서에 붉은 혈인이 나타나는 이적이 생기자 이미 하늘이 우리의 정성에 감응하
였다며, 앞으로도 창생구원(蒼生救援)을 위해서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를 다짐한다. 이것을 원불교에서는 법인정신, 창립정신이라고도 하며 매년 9인 선진의 법인
기도를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였는가’하는 점이
다. 성불을 위해 기도하거나 하루 빨리 진리를 깨닫고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위험에 빠진
창생을 구원하고자 기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원불교의 창립정신이 된 것은 원불교
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항상 창생을 위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소태산 대종
사는 일제치하에서 일제의 압제에 항거해야 되지 않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갑동리
와 을동리’라는 법문을 통해, 진정한 해방에 대해 논하였으며, 태평양의 물고기를 잡으려면
몽둥이로 되겠냐며 그물을 짜야 할 것을 말씀했다. 해방이 되자 정산종사는 「건국론」을
저술하여 민족의 나갈 길에 대해 세세히 제시하고 전재동포구호사업을 벌여 당시 어느 종교
에 못지 않는 구호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재동포구호사업을 벌일 때, 원불교가
이웃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처지에서 한 것이 아니라고 당시 선진들은 증언한다. 정산
종사와 총부만 하더라도 죽으로 연명하던 시절, 죽이나마 나누자는 정신으로 이웃의 고통을
나누려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독지가와 정부의 지원으로 귀환동포들을 크게 도울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원불교는 한국천주교에 못지 않은 사회 참여 정신과 활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원불교가 교세 면에서 정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국사회가 본격적으로 산업화하면서다.
원불교의 교리는 물질개벽시대에 정신개벽을 할 수 있도록 짜여 있지만, 본격적인 물질개벽
시대를 맞이한 것은 6~70, 80년대이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의 가난과 빈곤은 개인의 문제보다
는 사회의 구조와 정치체제에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대에 맞게 교법이 적
용되고 활용되기 위해서는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문 사회과학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창생을 구원하려고 해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에 대해 과학적으로 공
부하지 않으면 물질의 노예화된 언론만 믿고 있다가 진실을 외면하기 일쑤다. 가톨릭은 19
세기 무렵 극도의 위기를 맞자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교리를 발전시키고 이
것이 현대인들에게 환영받는 가톨릭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도학과 과학
의 병진, 처처불상 사사불공, 동정일여 영육쌍전,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으로 표현되는 원불
교의 주요 교의가 가톨릭 내부에서는 현대세계에 맞게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활용할 길을 열
었다. 또한 평신도, 재가교도를 사도직(교화직)으로 확대하면서 더욱 탄력적인 종교로 발전
하고 있다. 가톨릭은 새시대 새종교로 거듭나기 위한 힘찬 여정을 19세기에 시작했다. 원불
교 교법을 현대세계에 맞게 적용하고 현대인들의 갈등과 고민을 수용하는 데 가톨릭의 노력
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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