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논리는 지구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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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논리는 지구적 문제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10.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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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여성회 월례회에서 9월19일


장도영 " 환경운동가


밥·빨·청·애의 논리
일찍이 대종사님께서 “말만 하고 실행이 없는 사람을 경계는 하셨으나 그 말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하시었는데 저는 이 말씀에 감탄하였습니다. 평소에 말이 많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우리 교단에서는 내 말을 버리지는 않겠구나하며 세워 주시는 대로 사양하는 일없이 꾸준히 떠들어왔는데 그 사이 되돌아보면 크게 잘못된 점 없이 오히려 정전에서 제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하고 관계된 말들이 꽤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림에 대해서 주장한 내용을 엮은 책 ‘살림의 논리’에서 보면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는 일들인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는 것 등은 지구적인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단순한 것 같기만 한 살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망가지고 지구가 잘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육식이 우리의 건강에 필요하다라는 우리들의 생각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 십만 년 전 인간의 수렵생활을 시작하던 그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던지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흔히 기름기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예전처럼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없던 시절에는 기름기와 단 것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현실에서 사고로 인해 갇히게 되는 경우 구조시 장시간 살아 있으면 생존 가능성이 그 만큼 많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생존율이 높은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지방이 많아서 이 지방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의 우리 유전자 속에는 단 것과 기름기를 좋아하려는 것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생존의 이유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많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원리의 적용이 달라져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습성을 가지고 있다면 심각한 결과로 귀착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눈앞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고기입니다. 지구상에 길러지는 소가 13억 마리, 우리 인간이 60억, 소의 총무게와 인간의 총무게를 합해서 비교해보면 소의 총무게가 더 많습니다. 완전한 곡식을 섭취할 경우 고기는 한 달에 조금만 먹으면 충분합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도록 놓아두어도 충분한데 길러내다보니 내 몸무게보다 더 많은 고기를 쌓아놓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먹는데 도움을 받으려고 기르는 소가 정작 인간이 먹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먹고 있습니다. 콩 100g을 소에게 먹이면 소에게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고작 5%불과하며 비효율적입니다. 그나마 지구상에 먹을 것이 풍요로우면 모르지만 날이 갈수록 힘이 든다고 아우성입니다.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하라는 예전에 울창한 지역이었지만 나무를 무차별로 잘라내어 황폐해졌습니다. 전봇대를 어느 정도 기울어지는 범위에서 균형을 잡으면 서너명이 세울 수 있지만 그 이상 넘어가면 수백명이 세워도 세울 수 없는 시점이 있습니다.

영육쌍전의 생활
원불교는 회상이 열리고 힘을 갖추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가 쉽게 멸망할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내버려두면 된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이라고 우습게 보는 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된다고 생각하는데 정전을 자세히 보면 ‘영육쌍전법에의 일원의 진리와 삼학으로써 의식주를 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얻은 의식주와 삼학으로써 다시 일원의 진리를 구하고 그것이 바로 영과 육이 쌍전하는 생활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결함이 있으면 완전한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종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대산상사께서는 새생활 요강에 보면 일번이 청결이다. 실생활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니 1탕 삼찬, 소식과 많이 씹는 대목이 나옵니다. 살림이 지구적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원불교 식생활 문화의 정립을 위한 제언을 구상했습니다.
첫번째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입니다. 한성수 박사는 ‘왜 동물성을 먹으면 안 되는가’라는 글 속에서 ‘인간들은 무엇을 먹어야 되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무엇이 먹고 싶은가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건강이 날로 좋아지면 좋은데 자꾸 나쁜 쪽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공부라는 말을 요즘은 기독교에서도 쓰고 달라이라마도 씁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제대로 할 것인지 차분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끌려가지 않는 마음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식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입니다. 다시 말해 식사시간의 문제입니다. 틱낫한 스님(베트남)은 글 중에서 ‘식사시간이 중요하다, 식사가 시작되면 5분만 조용히 음식이 여기 오기까지 온 경로를 생각하며 조용히 하라. 떠들면서는 제대로 먹기가 어렵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집에서 가족들에게 해보니 장난하고 떠들고 질서가 안 잡히는데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맛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밥을 오래 씹으면 달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기술입니다. 밥먹는 시간은 내 몸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따로 있어서 세워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법문을 모시고 잘게잘게 소화하여 기둥삼아 내 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치시대가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의 공통점이 꼭꼭 씹어 넘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이상입니다. 오래 씹는 자체가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꼭꼭 씹어서 단맛을 느끼게 해주는 훈련 프로그램을 착안해보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두끼 정도 굶기고 딱딱한 누룽지를 먹여보면 훈련이 되지 않을까요? 식사하는 방식을 너무 거룩한 의식 같지 않게 일반인의 방식으로 원불교인들이 하는 방식으로 하나 만들면 좋겠습니다.
세번째 음식물의 뒷처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1년에 버리는 것이 8조원, 국민 1인당 20만원, 5인 가족 백만원 어치를 버립니다. 음식을 버리는 일은 거의 미친 짓에 가깝습니다. 대부분 음식을 남기는 분은 물어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잘못된 행위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결과는 같습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을 먹으러 갑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문제점은 배고프지 않은데도 먹어야 합니다. 감사기도하고 나서도 남깁니다. 먹는 고마움이 없습니다. 고마움이란 스스로 느끼도록 해야지 강요하면 안됩니다. 배고픈 다음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무조건 참는 건 고통이지만 잠시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배고픔에 익숙해져야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배고프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모릅니다. 이것이 배고픔의 진리가 주는 메세지입니다.

배고픔의 진리를 일깨우자
지금 풍요로워졌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지구는 절대 풍요롭지 않습니다. 간디는 “지구는 인간의 생존을 보장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일원의 진리는 우리를 나아서 살아가도록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다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욕망을 다 채운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욕망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부귀학도난(富貴學道難)-부귀한 사람이 도를 배우기 어렵다는 이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식생활개선과제
밥을 뜨는 것을 배식이라고 하면 배식의 무념 즉, 아무생각 없이 뜨는 것이 잘못입니다. 우리의 법문이 유념공부인데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천만이 힘을 합쳐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8조원, 음식이 썩으면서 내는 공해로 인해 건강을 해치는 것까지 합하면 무한합니다. 논은 우리에게 주는 쌀의 가치보다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가치가 더 큽니다. 국민들에게 유념공부의 중요성을 알려야 합니다. 정산종사님께서 以身先之-몸으로 먼저 행하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들어 원불교인들은 안남기더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그 다음 어려운 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을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까다로운 소비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격 있는 음식점주인이 나와야 합니다. 청소년 학교주변의 튀김집, 분식집은 국민 건강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식용유를 먹지 말아야 될 10가지 이유’, ‘잘못된 식생활이 성인병을 만든다’ 이 두권을 원불교 주부들은 꼭 봐야 합니다. 생식을 하면 좋은데 맛때문에 가열하여 소화효소를 파괴합니다. 음식의 목적은 우리 몸입니다. 맛과 영양을 서로 절충해 지혜롭게 찾아내는 것이 주부입니다. 주부는 꼭 여자가 아니라 主夫일 수도 있고, 主婦일 수도 있습니다. 까다로워지는 소비자가 되면 자신 없는 음식점은 문을 닫을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식생활 운동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먹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계절에 맞는 잡곡을 섞은 밥을 먹으면 단백질 아미노산까지 보완이 됩니다. 잡곡밥에 밑반찬 몇가지만 먹고 살아도 영양소가 충분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먹고 살아야 욕심이 가라앉습니다. 평소에 먹는 음식은 소박해야 합니다. 간디는 ‘건강과 장수는 절대력이 주는 극히 사소한 것 중에 하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五白 식품을 돌리자는 것입니다. 흰밥은 오곡으로, 흰밀가루는 우리밀로, 흰소금은 볶은 소금으로, 설탕을 조청으로 돌리자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실천의 의미로 우리 원불교가 주도가 되어 벌이면 농토를 살리고, 농부도 살리고 국가의 장래와 미래를 살리는 길이 됩니다. 살림운동에 동참하여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를 이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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