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도 폐지로
상태바
사형제도 폐지로
  • 전재만
  • 승인 2001.11.15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사형제도폐지 아시아포럼-서울 축사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먼저 오늘, 법종교 연합과 한국 사형제도 폐지 협의회가 주최하여 아시아 사형제도 폐지 대회를 이곳 대한민국 서울 국회의사당내에서 가지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를 비롯해서 전 세계에 생명의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당연한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오늘 아시아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행사는 더욱더 큰 의미가 있으며, 반드시 좋은 결실이 맺어지리라 생각합니다.
1. 저희 천주교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은 그분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그 생명 또한 존엄합니다. 따라서 창조주가 아닌 어느 누구도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박탈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2.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인간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생명은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인위적으로 박탈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범죄예방이라는 명분으로 아직도 시행되고 있는 사형제도는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사형제도의 존속이 범죄를 예방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가정에 불과한 것이며, 그 실제적인 영향은 전혀 미지수입니다. 따라서 이제 범죄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우리 모두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원수와 보복의 문화를 사랑과 자비의 문화로 바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형이 아닌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공동선과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며, 비폭력 원칙, 생명 보호와 같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3. 역사의 흐름을 보면, 18세기까지 사형은 극형인 동시에 핵심적 형벌이었으며, 19세기 전반기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각 국의 형사입법은 사형을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서양에서 사형의 제한시대를 열었다면, 20세기 후반에는 사형폐지의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1년 현재, 사형제도를 폐지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108개국에 이릅니다. 그리고 사형제도를 존치하고 있는 나라는 89개국으로서, 이 가운데 30여 개국에서는 제도상으로만 사형제도가 존재할 뿐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해 오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1980년대 이후 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 등 여러 인권 기구와 단체들은 사형을 폐지하거나 최소한 사형집행의 중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198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사형폐지를 목적으로 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에서는 인권규약상의 생명권 개념에 사형폐지를 당연히 포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4. 사형페지를 향한 우리 천주교회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현 교황이신 요한바오로 2세께서는 이미 1995년에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 사형은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하는 경우에 조차도 사형제도에 대한 공적인 반대가 커지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고 지적하시며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극단까지 가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아울러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도 교황께서는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형벌이든 범죄자들의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을 말살할 수는 결코 없다”면서 “회개와 갱생의 모든 기회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5.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인격과 존엄성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틀은 바로 정의로운 사회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보장은 인간 생명과 인간성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국가, 사회, 종교단체가 다 함께 인간 중심의 공동체 질서를 마련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천년을 살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힘과 지혜를 한데 모으는 이때 우리 모두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공동체의 그 어떤 것도 결국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생명의 문화를 정착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는 일은 우리 모두의 으뜸가는 사명입니다. 범종교 연합과 사형제도 폐지 협의회 주최로 치러지는 오늘 이 행사는 종교인들을 비롯해서 우리 모두의 이러한 강한 의지를 널리 표명하고,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초석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아울러 한국의 현 정부가 우리의 이러한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최초로 사형제도가 없는 나라, 생명을 존중하는 나라로 거듭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이 행사가 구호성 외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에 사형제도 폐지가 이루어질 때가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이 행사를 주최한 범종교 연합과 한국 사형제도 폐지 협의회 그리고 이 행사에 참석하시기 위해 한국에 오신 아시아를 비롯한 각 국 대표자들, 내외귀빈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