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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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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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2.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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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학부모 " 원경고등학교
저는 기억합니다. 우리아이가 날 찾아 온 때를.
점심 먹고 정말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이 실제처럼 똑같은 방에서 누워 자는 나를 아주 큰 삼각머리에 흑갈색 뱀이 나의 팔을 물어 난 정말 놀라서 일어나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너무 아파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것이 아들이 나에게 첫 울음을 선물한 것이지요.
그 울음이 19년을 키워 오면서 작은 눈물방울이 모여 큰 강물을 만들만큼 가슴속에서 흘려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기 때 너무 예뻐서 움직일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아플 때면 세상에 슬픔을 다 지닌 사람 마냥 슬펐으며, 주사를 맞을 때 아이가 울면 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누구나 부모란 쉬운 것은 아니라, 하지만 정말 많은 아픔이었습니다).
유치원에서 덩치가 제일 큰 우리 아이는 좋아서 안아도 상대 아이는 아파했고, 움직임이 크기에 다른 아이들이 싫어했어요. 그래서 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 자모회 회장과 임원 등 필요하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했습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 말이죠. 내 자식이 별나서 늘 선생님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요.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애가 6학년 때인가, 담임선생님이 우리 애가 다른 반 아이를 때렸으니, 학교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 황급히 학교로 달려가 막 계단을 오르는데, 다른 반 남자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발로 차고 머리를 때리면서 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어버린 몸과 입 속에서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며 미쳐버릴 것 같아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서있는데, 담임선생님이 무안했는지 그때서야 어머님 오셨다고, 때리던 선생님을 말리면서 시청각실로 저를 오라 하실 때, 또 한번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과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깡패 새끼를 키우느냐며 몇일 후에 졸업여행을 가는데 벌로 데리고 갈 수 없다며 집에서 반성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집에 와 너무너무 많이 울었습니다. 학교에서 졸업 여행을 가던 날, 집에서 학교가 보이던 터라 애를 아침 일찍 깨워 밥을 먹이고 혹시 친구들이 여행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 아파 할까봐 집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백화점으로 가서 선물을 사주고 돌아 다녔죠. 이러고 다니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 밤 밤새 울고 또 울면서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꼭 잘 키워 그 선생님들께 보여 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마음뿐 애는 잘 자라주질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 조금만 더 크면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회사 사택에 살고 있는 우리 애는 사소한 장난에도 학교로 전화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혼나는 일이 많고, 무슨 전과자 같이 낙인 찍혀 중학교에까지 아이를 따라 왔어요.(회사 교육재단에서 설립하여 초, 중, 고등학교가 한 단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봉사를 하려고 갈 때마다 담임선생님을 찾았지요. 그 때마다 별일 없다고, 잘 지낸다고 했지만 늘 아이 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울면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정말 하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매를 맞았고 말해도 믿어주질 않는다고.. 어느 날인가 학교 선배 아이 아빠가 술을 먹고 한밤중에 집으로 쳐들어와 발로 나의 허리를 차고 때려 119 구급차에 실려간 적도 있고, 저녁에 운동간 아이가 같은 반 아이 아빠에게 매를 맞고 들어 온 적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지냈지요.
중학교 3학년 1학기말쯤, 학교 폭력에 대하여 유난히 매스컴에서 떠들어댈 때쯤, 같은 반 아이가 인터넷 경찰서에 우리 아이가 너무 못살게 굴어, 학교에 가기 싫다고 글을 올려 경찰서에서 아이와 함께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진술서를 쓰고 담당 경찰께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더군요.
다음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을 만나 뵈니 학교의 수치라고 본보기로 전학을 시켜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졸업이 6개월 정도 남았으니 생각을 다시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만 그 학교에서는 저의 아이를 버리더군요. 저는 할 수 없이 전라도에서 애들 이모가 사는 강원도 거진 중학교로 전학을 위해 주소지도 이전하여 3학년 2학기부터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강원도의 겨울은 너무너무 추웠습니다. 관절이 나쁜 저에게는 아주 치명적이었습니다. 무릎이 퉁퉁 부어 다리를 오므릴 적마다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도 내 자식 눈칫밥 먹지나 않나 싶어 강원도에서 모든 살림을 하면서 학교 간 아이만 기다리며 지냈지요.
그러면서 한 달에 2회 정도 애 아빠에게 다녀오기도 했어요. 가는 시간만 12시간이 걸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버리지요. 몸은 애 아빠에게 와 있어도 항시 애 걱정이 앞서 부랴부랴 강원도로 달려가곤 했답니다.
그런데, 전학 간지 한 달쯤 되어, 7명의 애들이 우리 애를 때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는 더욱 불안했어요. 그러나 멀리까지 와서 생활하는 우리를 선생님들은 항시 걱정해 주시고 격려도 해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걱정 중에 강원체고에 진학하도록 주임선생님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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