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낭' 이공주와 소태산의 편지 - 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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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낭' 이공주와 소태산의 편지 - 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5.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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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4



이공주가 살았던 집


소태산 대종사와 이공주 일가 3대 4모녀의 만남은 경성교화 뿐만 아니라 새 회상의 큰 인재를 얻는 기연이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경성에서 익산으로 며칠날 내려 온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익산에서 원기9년 11월28일(음11월2일) 이공주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이공주 일가를 만난 후 곧바로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소태산 대종사의 2차 상경은 이공주 일가를 제자로 얻기 위한 계획적인 것이었다고도 보아진다. 익산 총부 건설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은 공사가 한창 바쁠 때임에도 불구하고 만날 사람이 있다며 갑자기 상경했다는 것과,? 이공주가 남편의 3년 탈상이 끝난지 10여일 정도 되었을 때이라는 것, 3대 4모녀를 만나고 바로 익산으로 내려왔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11월 28일(음11월2일) 이공주에게 연서 같은 편지를 석두거사라 이름하며 보낸다.
편지는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있다. 그 일부를 풀어쓰면 아래와 같다.
『서로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남과 북으로 나누어 있으나 서로 의지하는 마음은 진정 한시라도 풀어지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서로 길이 사랑하여 세세생생 함께 영산회상 만들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귀하신 네 분을 만나본 후로 견실한 성의와 고명한 재질을 생각마다 잊지 못하여 마음이 항상 즐거운 즉 이번 경성행에선 대단한 보배를 얻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편지를 이공주는 11월30일(음11월4일) 받았다. 기쁘고 감격스러워 바로 답서를 올렸다. 이공주의 답서에 음 11월6일자로 소태산 대종사가 두 번째 편지를 보내어, 음 11월9일 이공주는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오늘날도 며칠 사이에 이렇게 빨리 편지를 주고받는 편지 날짜를 생각하면 이공주를 제자로 얻은 것이 소태산 대종사로써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공주 또한 생불님 만남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보낸 편지내용을 보면 실감이 난다.
그 내용 일부분이다.
『…처사가 나오던 날 설중(雪中)이었는데 네 분이 수고를 생각지 않으시고 이 사람을 신(信)하시어 또 가보셨다 하오니 더욱 감사한 생각이 날로 깊어가나이다… 공주는 처사를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처사는 공주를 살펴보기로 주의하고 왔기에 곧 편지를 하였더니 이와 같이 공주도 처사를 믿고 응하시니 장차 처사의 법은 공주의 물건인가 하나이다. 이와 같은 공주를 얻은 고로 처사는 제자 몇을 데리고 잔치를 베풀어 경축가를 불렀사오니 명심하시고 세세생생에 이 같은 인연을 갈리지 않기로 부처님께 서로 기도하기를 대망하나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두 번째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공주 일가를 만나고 익산으로 내려오는 날은 눈이 내렸다는 것과 그 날 이공주 일가 4인이 창신동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다시 찾아갔었다는 것, 소태산 대종사의‘나의 법은 공주의 물건인가 하나이다’란 글 속에 이공주가 장차 ‘법낭’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13년(1928년) 6월2일(음4월15일)경에 이공주를 비롯한 여자회원 4~5인에게 “여자 중에서도 초창기 구인기도 시와 같이 기도를 드려보면 어떻겠는가?”하며 기도일을 원기13년 4월29일 그믐날(양 6월16일)로 정하여 밤 10시부터 11시까지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하다가 기도를 중지하라 하고 여러 말씀 중에 이공주에게 “공주에게 나의 법을 가장 많이 설해주었다. 공주는 나의 법낭(법의 주머니)이다”며 ‘법낭’이라는 아호를 주었다.
또 어느 날은 이공주를 칭찬하며 “공주는 낙언성실(落言成實)하고 두필성자(投筆成字)한다”했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이 떨어지면 그대로 잘 받아서 수필한다는 뜻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원기13년에 출가도 아닌 재가제자인 이공주에게 가장 많은 법을 설하여 주었다고 했다. 이공주가 원기17년 출가하여 총부 소태산 대종사 문하에 있으며 소태산 대종사 열반 때까지 곁에서 시봉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은 법문을 받들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공주는 소태산 대종사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자주 상서를 올리고 원기21년까지 하서를 받게 된다.
이공주가 보관한 소태산 대종사의 편지는 교단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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