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 불법연구회 출장소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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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불법연구회 출장소생기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6.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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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6


이동진화 선진



김삼매화 선진



민자연화 선진


원기10년(1925) 음12월23일은 이공주의 30회 생일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상경해 박사시화, 이성각 등과 함께 계동 이공주집 사랑채에 모여 생일을 축하했다.

도덕박사


이 자리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장차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를 묻는다. 이에 이공주는 여학교 때부터 생각하였던 『조선 여성을 위한 계몽운동을 하여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고 싶다』며 평소의 꿈을 이야기했다.
다시 소태산 대종사는 여성해방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물었다. 이공주는 『일본유학을 하여 문학박사가 된 뒤 글을 써서 조선 여성들을 계몽시켜볼까 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말했다.
『문학박사가 되어 일천만 조선 여성을 계몽시켜보겠다는 공주의 생각도 크고 장한 생각이요. 그러나 일천만 여성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 전체 조선국민에 비하면 적은 것이요, 더구나 수십억 세계 전체 인구에 비하면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조선국민, 그것도 반을 잘라서 1천만 여성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생각은 관견(管見:소견좁음)이라. 더욱이 글을 써서 여성을 계몽시키겠다고 하나 그 글을 읽는 사람 또한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공주는 생각을 더욱 넓혀 도덕박사가 되어 세계 전체 여성, 나아가 세계 전체 인류를 제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공주는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자신의 집 사랑채에 모시고 법문을 듣고 익산본관 내왕의 제반 비용 일체를 담당하였다.
원기9년 익산 본관을 건설하고 부서를 7부로 조직하였으나 당시 형편으로 서무부, 교무부, 상조부 3부만 운영하고 상조부는 전음광이 서기로써 사무를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성회원 10여명은 정식출장소가 생기기전 상조조합을 만들어 조금씩 저축해 나갔다.
소태산 대종사는 본관 상조조합 돈으로 영산에 토지를 매수하려고 영산에서 경성 이공주에게 편지를 보내 영산에 논 사는데 보탤 수 있도록 경성 상조조합 돈을 보내 달라고 했다. 이공주는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경성출장소가 생기기도 전 경성주무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경성회원들은 이공주를 중심으로 창신동 이동진화 집과 계동 이공주집으로 왕래하며 자발적 모임을 해나갔다.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11년 4월18일(음3월7일) 보낸 편지 주소에서 이공주의 계동 집을 『계동연구회』라 한 것으로 보아 불법연구회 경성출장소 개념으로 당시에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경성 첫 출장소



원기 11년, 경성회원 10여명은 지금까지 대종사가 상경하면 법문을 받들고 몇몇은 익산 본관에서 동·하선에 참석하였으나 익산본관과는 거리가 멀고 대종사를 자주 모실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지금까지 때에 따라 모이던 것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년 음 7월에 경성회원 10여명이 모여서 발기하였다.
『우리가 천행으로 대성(大聖) 종사주를 만나서 도덕공부를 할 마음은 있으나 공부를 하자면 가르칠 선생을 모셔야 하고, 모시자면 선생 계실 집이 있어야하고, 집이 있으면 지킬 사람과 유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니 우리 10여인이 합력하여 경성에도 지부를 설립하고 목적하는 공부를 하여보자』고 의논하니 그 중에는 가옥을 의연하는 사람도 있고 그 집을 지키겠다고 자원 출근하는 사람도 있고 또 나머지 몇 사람은 영원히 그 집의 유지비를 담당하겠다고 자원 결의하였다.
이동진화가 자신이 수양채로 사용하고 있는 시가 1천여원의 창신동 605번지 목조 초가 5간 1동과 4간 1동을 대지와 함께 희사하였다.
이동진화, 이공주, 민자연화, 이성각, 박공명선, 성성원, 이정원, 심오운, 김낙원, 이철옥 등이 합력하여 유지비를 담당하기로 하고 이동진화의 침모인 김삼매화는 출장소를 직접 관리하고 식당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장소와 유지 계획이 대강 완성되자 익산본관으로 정식교무 파견을 요청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20세의 청년 송도성을 경성출장소 교무로 파견한다. 경성출장소는 영광지부, 익산본관에 이어 세 번째로 교화 장소를 마련하고 교무가 파견되어 교화가 시작 된 곳이다. 그러나 영광, 익산과는 다른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영광은 지부라고는 하나 익산에 본관이 생기면서 영산에 있던 본관이 익산으로 옮겨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경성출장소는 새 회상 지방교화지로서 첫 번째 출장소라는 점과 한 나라의 수도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는 점이 더욱 의미가 있다.
송도성 교무가 부임해오자 이동진화는 가회동 자신의 집으로 옮기어 생활하면서 창신동을 내왕하며 공부를 하였다.
?송도성이 부임해오자 부임기념으로 송도성, 이공주, 이공주의 장남 박창기, 이동진화, 김삼매화 그리고 경서 부기학원에서 강습중인 조갑종이 기념촬영을 하는 등 환영했다.
스무 살의 교무가 부임해오자 몇몇 회원들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느 날 예회에서 송도성 교무가 《서전》의 한 대목을 거침없이 강론하는 것을 듣고 경탄했다. 이로부터 이공주를 비롯해 몇몇 사람은 송도성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고 깍듯이 모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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