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사의 빨래로 빚 탕감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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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사의 빨래로 빚 탕감됐으니..."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7.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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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 9


불법연구회 초창기 예회는 소박하게 이루어졌다.
원기13년 <월말통신>의 발행으로 예회록을 수록하여 그 당시 예회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어떤 형식으로 예회가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불법연구회 최초의 예회록인 익산본관 예회록이다.

초창기 예회
『6월3일(일요일) 즉 음4월16일은 본회 2회 중 제2의 예회요 겸하여 단원회 이었다. 오전에는 월례회로, 오후에는 분개(分開)한 바 당일 개황(槪況)은 여좌(如左). 월례회,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연구부 송도성 군이 등석(登席)하야 출석원을 검점(檢點)하니 남녀 총 40인이었더라. … 중략 … 전음광·송도성·송규 3씨가 차제(次第) 등단하야 ‘공부의 8계급’이란 연제로 장시간 열변을 토하고 동 12시에 폐회를 선언하다.』
소태산 대종사 임석하에 신축강당(현 구조실)에서 예회가 이루어졌으나 설법을 하지 않고 3인의 강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만 설법이라 하고 다른 사람의 설교는 강연 혹은 감상담이라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예회에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설법을 하지 않고 제자들이 강연 혹은 감각감상, 의견안 등을 발표하면 보설을 하는 것으로 제자들을 북돋아 주었다.
경성교무 이춘풍은 원기13년 10월29일(음9월26일) 익산본관 예회 겸 단회에서 ‘불은미 저축안’을 의견제출하며 불은미 저축은 회원 가족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먹을 곡식에서 한 숟가락씩 모아 매월 음26일 각 지부 및 출장소에 내면 이를 모아 익산본관 상조조합에 저금하며, 상당한 기금이 모아지면 회중에 전무 노력하는 동지의 공부비용과 명부(名部) 승급할 때 경사비용, 회중 유공 원로 봉양비용, 치료비, 열반비 등에 쓰자고 하였다. 그 의견에 일반 대중이 전원 찬동하여 가결되었으나 불은미(佛恩米)의 특성상 사용처를 시봉금으로 하자는 의견이 다시나와 다시 의결되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불은미 저축안을 들으시고 이춘풍의 원안대로 하도록 하여 각처 회원들의 동의를 구하여 더욱 권장토록 하며 본관으로부터 시행하도록 하였다.
원기13년 12월20일(음11월9일) 상경하였던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에서 계시다가 원기14년 1월15일(원기13년 음12월5일) 이공주가 등사기 한 대를 사서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이리역에 도착하였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만 본관으로 오고 이공주는 개인적 사정으로 본관에 들리지 못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불은미 저축
다음날(음12월6일) 저녁에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행가시 차중에서 어떠한 사람에게 하실 법설』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었다. 이번 경성행가시 일을 말씀하신 것인지 언제 차중에서 누구를 만났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어떠한 내용인지 알 수 없으나 경성행가시 보고 듣고 하신 것을 제자들에게 간혹 말씀하신 것으로 전해진다.
소태산 대종사 경성출장소에 상경하여 예회 등에서 많은 법문을 하셨음에도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지 원기13년까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개인의 수필에 의존 할 수밖에 없으나 그나마도 전해지는 기록이 소수여서 아쉽다. 그 이후에도 소태산 대종사 경성에서 하신 많은 법문 중 몇 편 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원기13년 음12월<월말통신>제10호에 경성출장소 예회록이 처음 소개가 되었다.
『음12월6일 예회
본 일은 강한(降寒)인 고로 오전11시경까지 회원의 내집(來集)을 기다려서 교무 이춘풍씨 출석원을 점명하니(명단 생략) 합8인이요. 전회(前會)를 주무하던 이공주씨는 긴급한 소관사로 인하여 일전 호남방면에 출발하였고 기외(其外)회원은 혹병 혹사(事)로 많이 불참 하였다. 「삼강령 팔조목」을 문제로 하여 장시간 윤회(輪回) 문답하고 오후 2시경 폐회하다.
3시30분에 다시 모여서 본관 <월말통신>을 박해산, 이춘풍 양씨가 낭독 설명하니 회중은 환희 경청 하였으며 동5시에 산회하다.』

조전권의 법문 귀동냥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주로 이공주가 모시고 법설을 들었다. 공양주인 조전권은 어찌하면 법설을 한번 들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장작불을 때다가도 법문을 하시면 장작불을 아궁이 밖에 끄집어 내놓고 귀동냥을 하였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좋은 말씀이 있다하면 방밖에서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조전권은 후에 추모담에서 경성출장소 공양원 시절을 이야기하였다.
겨울 어느 날, 팥죽을 끓여먹고 빨래를 하러 갔는데 갑자기 진눈깨비가 몰아쳐 손등이 깨지는 것 같았다. 연신 손을 입으로 불며 겨드랑이에 넣으며 빨래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마침 종사주께서 방문을 열고 나오시다 빨래 광주리를 받으시며『방안에서도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얼마나 추웠느냐』하시면서『네가 겁겁 다생에 빚을 진 것이 있더라도 공중사의 빨래로 빚이 탕감되었으니 마음속에 하나도 꿀릴 것이 없게 하거라』하시는데 나는 죽 눈물을 흘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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