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11 -서문성 교무의 초기교단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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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11 -서문성 교무의 초기교단 산책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7.2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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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주의 본가를 보고 국한없는 큰 살림을 하라


경성교무 이춘풍은 어려서부터 잠재해있던 냉복병이 재발하여 한약으로 다스려도 보고, 철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낳지 않았다. 익산본관에 소식을 전하자 소태산 대종사 문정규를 대동하고, 원기14년 7월 9일(음6월3일) 상경하였다. 이춘풍의 병 상태를 본 소태산 대종사는 약을 지어 가지고 7월 17일 익산본관으로 정양차 보냈다. 그래서 경성출장소는 조전권과 김삼매화가 관리하고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본관에서 교무가 오기까지 경성출장소 사무를 전담토록 하였다. 이공주는 6, 16, 26일 예회일 뿐만이 아니라 1, 5, 11, 15, 21, 25일은 창신동출장소에 가서 모든 관리를 하였다. 경성출장소 관리를 이공주에게 전담토록 하고 7월26일 귀관한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출장소로 과일을 보내 8월10일 예회에 공양케 하여 경성회원들을 위로하였다. 그 후 소태산 대종사는 본관에서 전삼삼으로부터 경성의 상황을 상세히 듣고 곧바로 9월17일 이공주에게 편지를 썼다. 남바우 소나무 편지에 이공주의 제반 사정을 생각하여 3가지를 제시하면서 영광 다녀서 상경할 때까지 진행하라고 하였다. 한 달에 9일간 출근 시무하기가 곤란할 터인즉 조전권을 연습도 시킬 겸 한 달에 한번만 가서 문서와 부기를 하며 검사하라는 등의 말을 전했다. 9월19일(음8월17일) 열차로 영광으로가 음18일 신흥지부 예회에 참석한 소태산 대종사는 영산에 들렀다가 본관으로 귀관해, 10월28일(음9월26일) 추기제사 기념식을 보고 이튼날 경성을 가기 위해 본관을 나섰다. 기념행사를 보고 원평집으로 가는 조송광 회장과 이리역을 가는데 전음광이 동행하였다. 꽃밭재를 넘어 남바우 등성이를 오르면서 조송광이 마을 뒤 숲속에서 서너 그루가 용트림하며 뻗어 오른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저 소나무는 항상 보아도 아름다워라, 우리 회관에 옮겨갔으면 좋겠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소리를 듣고 좁은 생각과 적은 자리를 뛰어넘지 못함을 말하며 우주의 본가를 보고 국한 없는 큰살림을 하라고 역설한다. 이때의 법문을 동행했던 전음광이 수필하여 <월말통신> 제21호에 “대우주의 본가를 차자 초인간격 생활을 하라”는 내용의 법문으로 소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상경하여 경성출장소의 제반 형편을 살피고, 본관 서무부 감원인 김광선을 경성교무로, 서무부 서기 김영신을 경성출장소에 주재케 하였으며, 최상옥도 같이 주재토록 내정하여 익산 본관으로 편지를 보내었다. 김광선이 부임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11월28일(음10월28일) 조전권을 데리고 본관으로 왔다. 조전권은 원기14년 제10회 정기훈련(기사동선)에 참여하였다가 상경하여 경성출장소에서 근무를 계속하였다. 조선 박람회 일제는 조선을 강탈하고 그들의 치적을 내외에 과시하고 일본 제품을 홍보하기 위하여 1915년 9월11일~10월13일까지 시정5주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경복궁의 건물들을 1/3정도 뜯어 일본인들의 별장, 사찰, 요리집, 주택으로 옮겨지었다. 자선당 건물은 통째로 일본으로 무단 방출하였다. 이때부터 1929년 시정20주년 기념 조선 박람회까지 경복궁 안 건물 근정전을 비롯 6개의 전각을 제외하고 철거하려는 계획아래 4천여 간을 철거하였다. 조선물산 공진회에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임금의 집도 구경하고 단풍놀이 가듯 구경을 가서 110만이 넘는 사람이 구경을 하였다. 당시 전 조선의 인구가 1천5백만, 경성의 인구가 30여 만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1929년이 되자 일제는 시정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준비하여 10월1일~10월31일까지 대대적으로 열었다. 경성에서 열리는 조선박람회 소식은 익산까지 전해져 익산본관 회원들은 소태산 대종사에게 박람회 구경을 권하게 된다. 그리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천조(天造)의 무궁한 박람회에 대하여 법설을 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대종사가 조송광에게 남중리 소나무 법문을 하고 경성행 열차에 몸을 실었는데, 이때가 박람회 폐막 이틀 전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회원들과 경복궁에서 열리는 조선박람회를 10월30일 혹은 31일에 관람하였다. 경성에서 박람회를 관람한 소감을 익산본관에 돌아와 기사동선(음11월6일~15년2월6일) 중 음11월26일 예회에서 ‘기틀을 보면 편안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익산 본관 회원들에게 설법하였다. 이 때 법문을 받들었던 송도성은 수필에서 “무진 구월경 종사주께옵서 상경 하시와 당시 개최중에 있든 조선박람회를 보시고... 대한 감상을 말씀 하시니 아래와 같더라”라고 기록하였다. 또 당시 설법에 “김남천은 환희에 넘쳐 성성한 백발을 흩날리며 춤을 추고, 전삼삼의 감탄에서 우러나는 묵묵한 재배(절)는 만장의 흥기(興氣)를 고무시켰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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