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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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18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11.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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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성지부 신축 2
소태산 대종사 공사감역을 하면서 여러 노동자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하여도 그저 도와주는 것이 있어야해. 암만 애를 써도 억지로는 살수 없는 거야』라는 공사인부들의 말을 들은 대종사는 다음날 경성출장소 예회에서 <음조와 음해의 출처에 대하여> 『우리에게 돌아오는 복과 불복, 죄와 불죄는 부처도 조상도 귀신도 아닌 다만 우리 마음작용 육근작용에 있다』라고 설법하였다. 이완철 경성교무는 예회시간에 전라도 영광사투리에다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설교를 해 경성회원들이 처음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소태산 대종사께 항의하는 회원들도 있었다. 『완철 선생은 시골로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소태산 대종사는 타이르듯 말했다. 『완철이가 이적이 난 줄 모르네.』 이완철 교무는 발음이 분명치 않았지만 내용은 고준하고 무진장한 뜻이 있으며 그 순진한 열성에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경성출장소 돈암동 신축공사는 오창건이 감역하며 진행되고 경성교무 이완철은 창신동 출장소에서 예회를 보고 산 넘어 공사현장을 왕래하며 인부들을 독려하였다. 그런가하면 회원들에게 순교를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건축공사현장에서 소태산 대종사 이완철 교무를 불러, 「이 짐을 지고 역까지 가자』고 하였다. 이완철 교무는 난색을 보였다. 『제가 지금 회관 수축관계로 10여명의 인부를 부리고 있을 뿐 아니라 교무의 위신상 난처하나이다.』 소태산 대종사 그 짐을 건축 감역하던 오창건에게 지우고 다녀오신 후 이완철에게 물었다. 『완철은 아까 처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크게 잘못한 일은 아닌가 하나이다』 소태산 대종사 엄중히 경책 하였다. 『완철의 이유에도 일리는 있으나 짐 하나 지기를 부끄러이 여겨 스승의 명을 어기고도 그 일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전무출신의 본분이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만생을 널리 건지는 큰 일꾼이 되기를 기약하리오.』 이완철은 잘못을 사죄하고, 그 후로는 위신을 생각하여 허식하는 일 없이 평생을 수도하였다. 김영신은 사산 (오창건)선생의 공심이란 내용을<회보>제42호(원기23년 2,3월호)에 발표하면서 『...경성에 계실 때 그 점잖으신 어른이 자녀와 같은 저의 의복상자를 지고 대도시를 기탄없이 걸어서 경성역까지 갖다 주신 일도 있사오니...』라고 하였다. 이글의 정황으로 보아<대종경> 교단품 11장 법문에서 오창건이 짐을 지고 경성역까지 간 것은 김영신이 짐을 지고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성출장소 신축 유공인 경성출장소는 처음 1,300여 원으로 공사를 착수하여 지환선씨의 다액의 희사와 익산, 영광회원들의 보조로 공사비를 충당하여 삼복더위와 비바람을 무릅쓰고 5개월여에 걸쳐 총 공사비 2,000여 원으로 완공하였다. 경성교무 이완철은 <경성지부 신축낙성에 제(際)하야>라는 글에서『… 해지부(該支部)의 시종본말을 평론 하자면 이동진화씨는 뿌리를 숨기고, 이공주씨는 줄기와 가지를 배양시키고, 지환선씨와 여러분은 잎과 꽃을 피게 한다 하겠으니 이 미래의 전도도 양양한 융운을 볼 줄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돈암리 회관은 일식과 양식을 절충한 신식 12간 목조 기와집으로 법당에 300여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또 기존 별채 건물을 합하여 총20여간이 넘었다. 회관 완공 당시의 모습을 이완철은 이렇게 적고 있다. 『… 20여간의 목조로 구조도 웅위하고 장식도 선명하여 내인행객(來人行客)의 찬미를 받고 있습니다. 전후 좌우의 유리창은 산광수영(山光樹影)이 반영하야 한 폭의 회화를 이루고, 홍합력 차양은 풍우방지에 외미(外美)까지 띄었으며, 황색면기는 금면목(金面目)을 장식하야 금상첨화의 신미화를 더하였으며, 대해연(大海然)한 12간 장방은 망지무제(望之無際)하야 삼백명의 수용량을 가져 분즉위삼(分則爲三) 합즉위일(合則爲一)로 분합 자재한 묘기관(妙機關)이 되어있고 … 하략 …』 돈암동 경성출장소는 골짜기에서도 맨 위에 위치해있고 경성출장소 안에 앵두나무가 많아 앵두나무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새로 신축한 12간 법당은 미닫이 칸막이를 질러 3간으로 나누었으며 한쪽은 조실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기존 3동의 초옥은 별채 건물로 사용하였다. 사무실 채는 방 두간이 있었고 두 방 사이에는 불을 땔 수 있는 부엌이 있어 남자숙소로 이용하였다. 남자숙소 방 한 칸은 이완철교무의 방으로 후에 서대원, 박장식 등이 경성지부에 오면 같이 사용했으며 다른 방 한칸은 소태산 대종사 자녀인 박길연과 정자선 등 학교 다니는 남자숙소로 사용하였다. 식당채는 L자 형으로 식당겸 여자숙소로 이용되었다. 여자숙소는 여자교무인 이동진화와 여자 전무출신들이 사용하였다. 한 채는 창고로 사용하였다. ?새 회관은 여러 가지로 금상첨화라 할 수 있으나 다만 아쉬운 것은 회관의 위치가 시내와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한 것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새 회관을 완공하고 첫 예회겸 낙성식을 원기18년 11월3일(음9월16일)에 거행하였다. 오전11시 23명의 회원의 참석 하에 개회하여 이공주가 건축수지 및 감상담을 발표하고, 오후에 신축강당을 배경으로 27명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경성회관 건축에 공로가 큰 건설위원 오창건과 여자교무 이공주가 11월7일(음9월20일) 익산총부로 내려옴으로서 경성출장소 신축과 관련해서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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