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19-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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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19-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11.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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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종사님은 정치인 같고 대원 선생은 도인 같으시다.
경성출장소 새 회관이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충분하자 이완철, 이동진화 교무는 경성출장소 제1회 정기훈련 즉, 계유동선(원기18년)을 11월22일(음11월6일) 22인이 참석한 가운데 예회 겸 동선 결제식을 시작하였다. 경성출장소서 첫 정기훈련 3개월간의 동선은 익산 총부 선에 준하여 이루어졌으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완철 교무는 경성지부에서 13년간 동·하선을 경성을 떠날 때까지 한해 한두 차례 열었다. 경성출장소는 3개월 동선을 무사히 마치고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동진화 교무의 사회로 원기19년 3월20일(음2월6일) 예회를 겸해서 해제식을 했다. 원기19년 5월9일(음3월26일), 익산총부 제6회 총대회 선거에서 교정원장에 송규가 당선되었고, 경성출신 이공주는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경성출장소는 이완철, 이동진화 교무가 유임되고 감원 겸 식사주임에 김삼매화가, 전문 순교에 지환선이 임명되었다. 경성출장소에서는 원기19년 6월17일(음5월6일) 예회 겸 갑술하선 결제식을 23명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서대원이 사회와 강연 그리고 『공부에 대한 설명』을 하여 하선과정을 알렸다. 하선에는 남자3인, 여자12인 총15인이 입선하였다. 이완철 교무가 <회보>제10호에 경성출장소 소식을 기고하였다. 『본소 신축정사에 제2회 하기선원이 열리게 되었다. 오욕의 화염이 타오르는 열대도시를 지척에 두고 초인간적인 수도기관이 출현된 것도 일대 기사이며 현세향락과 허영의 생활을 영위하시는 선원제씨의 청고이취(淸高理趣)도 가희가(可喜可)할 바이며 본 지방 회세 발전을 목표로 하여 선원개설에 적극 알선하는 지환선씨의 특 지도가 찬할 바이다. 14~15인에 달한 노소선원은 건강한 몸과 활발한 정신으로 연도수학으로 일과를 삼아 그날, 그날을 되풀이 할새 열열한 이론은 우주의 묘리를 설파하고 송풍임월 사이로 흘러오는 청아한 염불성은 산수자연의 적막함을 깨트린다. 인간의 진취미야 속객(俗客)이 어찌 아는 바이랴…』 소태산 대종사 경성출장소 상경에 앞서 7월10일(음5월29일) 이공주가 먼저 상경하여 소태산 대종사 상경하면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7월14일(음6월3일)에 소태산 대종사 상경하자 선원대중들과 함께 맞이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하선에 참여한 선원들을 격려하며 점검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7월15일(음6월4일)날 경성회관 앞뒤 뜰에 풀이 난 것을 보시고 친히 제초작업을 하시며 모든 초목의 썩은 낙엽을 긁어 주사 도량을 청결히 한 후에 하선에 참여한 회원들에게 말씀하신다. 풀 뽑는 대종사 『오늘 내가 앞뒤 뜰의 풀을 뽑은 뜻을 아는가? 자고로 부처와 범부가 그 심전을 다같이 가졌지만 그 심전에서 발생되는 악심을 뽑아버려 깨끗하게 매어버린 자는 부처라 칭하고 그 마음에서 생각나는 대로 하야 그 악심을 뽑지 못하고 묵정밭을 만든 자는 범부라 하나니라. 대개 자기 심전의 악심을 맬 줄 아는 사람이 마당의 잡초도 맬줄 아나니 집이나 몸이나 마음이나 단속을 잘 할 줄 알아야 방가위지(方可謂之) 사람이요. 불시라 참다운 사람이라는 것은 저의 심전도 맬 줄 아는 동시에 남의 심전까지도 맬 줄 아나니 제군들은 오늘 나의 풀 맨 뜻을 알아들을 지어다.』 이공주는 법문을 받들며 수필 하였다가 원기19년 8,9월호인<회보> 제11호에 발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또한 음6월6일,16일 예회에 법설을 하여 하선에 입선한 선원들의 공부를 한층 북돋아주고 7월30일(음6월19일) 이공주와 함께 익산 총부로 출발하였다. 경성지부에서는 삼복더위와 궂은 날씨 속에서 3개월간의 갑술하선을 당시 경성근황과 해제일 예회록을 통하여 하선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갑술년 해제 때의 경성근황이다. 「본 소 선원은 3개월을 앞두고 맹렬한 더위와 싸워가면서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자연의 바퀴가 구름을 따라 어느덧 해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개중에 대중의 대각불이 나지 못하야 여러분의 축망을 보답하여 드리지 못하는 것은 유감천만이오나 그러나 선원 제씨의 건강하신 몸과 담락하신 취미로 지내와 대도의 신념과 정법의 이해가 나아지니 이는 부처의 종자를 심음이라. 더 좋은 결과를 바래고 이로써 다행을 삼습니다. 또한 유감 되는 바는 전보에 입선인 발표에 14~15인이라 하였는데 정식 성적발표에는 5~6인에 불과하게 되었사오니 용두사미격이 되어 책임자로서는 많은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선원 중 각자 철저한 사정으로 인하야 중도에 퇴선자도 있고 혹은 자유선으로 성적을 보지 못한 이도 있으며 또는 시험기에 사고로 빠지신 이도 있어 부득이 그리 된 것이 오니 피차 양찰 하옵소서.」 경성지부에서 가정이 있는 부녀자들 위주로 3개월간 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볼 수 있다. 서대원과 지환선 서대원이 경성출장소 제2회 정기훈련에 참석하게 된 것은 원기19년. 총부 연구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건강이 좋지 않아 휴무를 하면서 1년간 각지를 순회하며 고경도 연구하고 정양도 하였다. 그러던 중 원기19년 6월6일(음4월25일) 상경하여 경성출장소에서 정양하며 정기훈련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서대원이 경을 읽고 천도법문을 읽는 소리만 들어도 천도가 저절로 될것같이 좋아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도 서대원에게 천도법문을 읽으라 하시고 들으신 후 서대원의 천도법문 읽는 것에 대하여 많은 칭찬을 하였다. 서대원이 총부, 경성, 부산 등지에서 경을 읽고 설교를 하면 그의 풍모와 음성에 회원들이 좋아했다. 그리하여 회원들은 『종사님은 정치인 같으시고 대원선생은 도인 같으시다』고 하였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는 박력 있고 활동적인 모습이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서대원의 맑은 음성과 한가한 태도가 산중도인처럼 느껴 졌었다고 소태산 대종사 당대 제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경성출장소는 20여명 조금 넘는 회원이 모여 예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성출장소 전문순교인 지환선은 교화와 회관일에 열성이었다. 그는 원기16년에 신원요의 지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어 매년 동하선은 물론 평상시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6대요령이 3권이나 헤어지도록 공부하였다. 그는 경성회관 신축과 유지발전에 많은 희사를 하는 등 새 회상 만난 기쁨으로 살고 있었다. 지환선은 원기17년 익산총부 제14회 정기훈련인 임신하선(3개월)에 참여하여 회화시간에 자신의 입회 감상담을 하였다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친이 배우자를 골라 일본유학을 시켰으나 그는 변호사가 되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양에 산다는 것을 알고 평양에 찾아가 집의 가재도구를 산산이 두들겨 부수어 버리길 수 차례 하였다. 전라도에 생불님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익산본관에 찾아와 종사주를 뵙고 소원을 하소연하여 법설을 받든 후 마음을 고칠 것을 다짐하고 평양에 가 그들의 어린아이를 업어주는 등 안심시키자 그들이 교화 되었다는 등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총부에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경성출장소는 원기19년 12월2일(음10월26일) 예회에서 다음 예회부터 열릴 동선준비를 토의하고 준비를 하여 12월12일(음11월6일) 제3회 경성출장소 동선 결제를 하였다. 처음에는 5~6인으로 동선이 시작되었으나 한 두 사람씩 입선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러나 동선은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한 듯하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출장소가 돈암리 회관을 신축하고 안정이 되어가자, 각지에 지부들이 생기는 등? 회무에 바빠 상경하는 일이 과거에 비해 줄었고 상경하여서도 10여일 정도 있다가 익산 총부로 귀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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