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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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12.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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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새회상의 수달장자'황정신행'귀의


원기 92년도 새해에는 교도님들의 마음에도 덕풍과 순경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2년 3월22일 상경하여 4월12일 귀관 때 까지 3월28일 예회와 4월7일 예회에서 설법하시었다. 20여일 경성에 머무는 동안 새 회상의 수달장자라고 일컫는 황정신행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황정신행은 마음이 괴로워 원기21년 여름 금강산에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다. 이때 장안사 영원암에서 개성에 사는 불법연구회 회원 이천륜을 만났다. 영원암에 같이 묵으면서 서로 오가는 동안 황정신행은 자신의 결혼 생활로 인한 번뇌와 괴로움을 털어놓게 되었다. 황정신행과 이천륜은 마하연선원에서 다시 만나 이천륜이 자신이 다니는 불법연구회가 경성에도 있다고 하며 그곳에서 정신을 수양하면 마음이 편안하리라고 간곡히 권했다. 이천륜과 만나 생활하면서 그의 보살행은 황정신행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황정신행은 경성에 돌아와 돈암리에 있는 불법연구회를 찾아가 원기21년 10월15일에 입교를 하였다. 그러던 원기22년 4월 어느 날 돈암리 지부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였다는 연락을 인편으로 받고 돈암리에 있는 경성회관으로 갔다. 그 당시 회고담이다. 회관 응접실에서 대종사님을 뵈올 때 그 자리에 담임교무(경성지부 교무)셨던 응산님(이완철)과 육타원님(이동진화)이 함께 계셨다. 나는 대종사님을 알아보지 못한채 인사할 줄도 모르고 그냥 있었다. 대종사님께서는 무명바지 저고리를 입으셨고, 육타원님은 옥색치마저고리를 입으셔서 너무나 아름다웠다. 처음 뵙는 대종사님은 안광(眼光)이 부셨다. 겁 없이 들어선 나는 대종사님의 위풍에 눌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으며 완전히 압도되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종사님의 첫 말씀이셨다. 나는 천륜(개성 이천륜 교도)씨의 소개로 왔다고 대답하고는 물었다. 『여기는 부처님 공부하는 곳이라던데요?』 『그렇지라우』 처음 듣는 전라도 사투리였다. 나는 촌사람들이 하는 곳인가 싶어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생겼고 방자해 졌다. 『어떻게 부처되는 공부를 합니까?』 대종사님은 나의 당돌한 질문에 『내가 가르쳐주지』하시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키시며 『이 시계는 어디로 돕니까?』 『오른쪽으로 돌지요.』 『몇 번 돌면 하루가 됩니까?』 『스물 네 번입니다』 『몇 일 동안 돌아야 한 달이지요?』 『30일 돌면 한 달이지요』 『몇 달 돌면 1년이지요』 『열 두 달되면 1년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쉬운 것을 물으시니까 잠시 위촉되었던 내 어깨가 펴지면서 말씨도 약간 거칠어졌다. 어린아이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왜 물으실까 하고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사람이 얼마나 살아야 많이 사는 것입니까?』 『일흔 살을 살면 많이 살지요』 『그렇지라우, 부처되는 것은 내가 가르쳐줄테니 이완철 선생만 만나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황정신행은 지난해 10월에 입문하였으나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정신행(淨信行) 이라는 법명을 받게 되었다. 법명을 받고 2,3일간 계속 찾아가 가슴속 의심을 물었다. 황정신행은 소태산 대종사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몰라 그저 ‘시골 선생님’이라 불렀다. 황정신행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 후 회관 예회에 자주 참석하는가 하면 그는 새벽4시에 일어나 돈암리 회관에가 법당에 좌복을 깔고 이완철 교무에게 하루에 1시간씩 <금강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회관에 드나들면서 회관 살림살이에 관심이 생기어 부족한 것을 알고 살림도구며 곡물을 가져다 날랐다. 이것이 시발이 되어 많은 희사를 하여 새 회상의 수달장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신행은 법열이 올라 이화동집에서 거처를 돈암동 회관으로 옮겨 공부에 더욱 재미를 붙였다. 황정신행은 원기22년부터 몇 년간 익산 총부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듣고 훈련을 나기 위해서 짧게 일주일 길게는 한달 정도 머물렀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가 인력거를 타고 익산 총부로 들어오는 황정신행을 보고 말했다. 『기계는 괜찮지만 인력거는 사람이 끄는 것이라..., 이 다음에 땀 날 때가 있을 것이요』 『남들도 모두 타는데요』 『차차 내 말이 이해될 때가 있을 것이오』 이 무렵 익산 총부 구내에는 80여 명의 대중이 생활했다. 일제 치하의 곤궁함은 우리 민족이 한결같이 겪는 고난이었지만 총부의 사정은 더 어려웠다. 황정신행은 총부에 내려갈 때면 힘닿는 대로 재물을 가지고 갔다. 황정신행은 1903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자수성가한 상인으로 이재에 밝아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고 일찍 개화하여 맏딸인 그녀에게 신식교육을 받게 하였다. 연안보통학교를 거쳐 13세에 경성으로 유학, 이화여학교 중등과를 17세에 졸업하고, 이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우던 중 부친의 열반으로 귀향, 3·1운동을 맞았다. 19세에 만주 하얼빈의 유치원 보모로 2년 근무하다 21세에 길림성 여자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한 후 이어 유치원교사를 하다 25세에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 유치원교사로 일하던 중 27세에 황해도 재령출신의 강익하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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