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초기교단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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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성 교무의 초기교단 산책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4.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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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과 전재동포구호사업


8·15광복 후 나라 현실은 또 다른 시련에 부딪치고 있었다. 사상은 좌우로 분열된 채 국내 정치현실은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난립한 가운데 갈등과 대립을 이루고 있었다.


정산종사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국가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광복 직후 새나라 민주국가 건설의 길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건국론》이라 하고, 1945년 10월 프린트 판으로 발간하여 정계요인들과 교단요인들에게 고루 배부했다. 《건국론》은 교단이 나아가야할 길과 전재동포구호사업의 정신적 지주로서 구호사업에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정계요인으로는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등의 열열한 공감을 받았다. 거국적인 구호사업에 처음에는 30여개 단체가 참여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8,9개 단체만 남았고,


그나마 단순 봉사활동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법연구회 구호사업은 물질적 혜시에만 치중하지 않고 전재민들에게 정신적 주체성확립과 인격수양을 강조했다. 교법정신에 입각한 전단을 작성해 배부하기도 했다. 귀환동포 가운데는 학병으로 끌려갔었던 청년학생들이 많았는데 송도성 구호 부소장은 이들에게 특별히 숙식을 제공하고 그들의 앞날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었다.


불법연구회 구호소는 처음에 학병들을 덕성여학교에 수용하다가 삼청동 학생회관으로 옮겼다. 서울에 있는 학병들은 자체 연맹을 조직해 서울에서 가장 큰 강당인 부민관에서‘명사 사상 강연회’를 주최했는데 송도성은 종교계 대표로 사상강연을 했다.


불법연구회 서울구호소 임원은 46명으로 밤낮을 교대로 활동했으며 임원 이외에도 서울지부회원들이 식사일체와 병자간호에 나섰으며, 개성지부에서는 의복을 만들어 공급했다. 불법연구회의 헌신적인 구호사업에 김구, 김규식, 신익희, 조소앙, 엄항섭 등이 구호소를 격려차 자주 다녀가곤 했다.



한남동 약초 관음사



세브란스 병원에 임시 수용하고 있던 고아들 18명을 모아 원기30년(1945) 12월 10일 황정신행이 운영하는 동대문 부인병원에 수용했다.


황정신행은 성의철과 함께 한남동 약초 관음사를 찾아갔다. 주지는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노자(路資)가 없다며 도와 달라하여 1,000원을 주었다. 그들은 불법연구회가 맡아줄 것을 원했다. 그들이 떠나자 교단에서는 약초 관음사를 정각사(正覺寺)로 이름을 바꾸고 송도성, 이동진화, 황정신행, 이성신 등이 묵으며 <전재구호소>란 간판을 걸었다. 그 후 원기31년 2월 동대문 부인병원에 임시 수용했던 고아들을 정각사로 옮기고 <서울보화원>이라고 개명했다. 황정신행이 원장을 맡았고, 고아 35명과 임원은 20명이었다.


돈암리에 있는 서울지부는 도심 외각에 있어 방매하고 임시로 한남동 정각사로 옮겨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계속하다가 6월에 용산구 한강로에 있는 일인사찰 용광사를 인수해 옮겼다.


불법연구회 전재동포 구호사업은 1945년 9월 10일부터 1946년 3월 31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6개월 20일간을 계속했다. 서울 구호소는 20대 초반의 출가 회원들이 주축이 되고, 서울지부 회원 등이 헌신적으로 전개하여 마무리 했다.


구호기간 중 소요된 경비는 50만원이 었다. 약 7개월간 식량은 백미 420가마, 잡곡 240가마가 들어갔다. 구제 상황은 급식이 42만명, 숙박 인원이 11만명, 의복 제공이 3천건이었다.


전재동포 중에 전염병에 감염되어 발진티프스로 78명이 사망했고, 응급치료자 400명, 입원치료자 100명이었다. 헌신적인 구호활동을 하다 박제봉 등 임원들 상당수가 감염돼 고생했다.


주산 송도성의 열반 송도성이 영산지부 교감과 지부장으로 근무할 때 학원생 중 한 명이었던 정성집(서울 영동교당 교도)도 서울구호소활동에 처음부터 끝까지 봉사했다.


그는 구호활동 중에 전염병이 옮았다. 송도성이 정성집을 돈암리 서울지부로 데리고 가 40여일간 한의사의 치료를 받도록 해서 전염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송도성도 구호사업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이재민에게 발진티프스에 감염되었으나 감염사실을 몰랐다.


송도성은 원기31년 3월15일 학림 설립문제, 보화원 운영 자금문제, 구호사업 철수와 총부 출장소?서울 설치 문제 등의 현안을 상의하기 위해 트럭으로 8시간이나 걸려 익산 총부로 내려오는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구호사업 마무리 단계인 3월 27일 40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출가·재가 모든 대중은 소대산 대종사의 열반으로 큰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송도성이 열반하자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송도성의 열반으로 각지방 교무 요인들이 총부로 오자 총회를 앞당겨 4월 2일날 했다. 불법연구회 전체 전재동포구호사업은 서울, 이리, 전주, 부산 등지를 합해 80여 만명이 구호를 받았고, 구호에 500여 명의 불법연구회 회원이 동원되었다.


이렇게 헌신적인 구호사업으로 인해 지역사회에 신용을 얻어 서울에서는 당국으로부터 일인 사찰인 한남동 약초 관음사(현 예술인교당) 용산소재 용광사(현 서울교당)를 불허 받았다. 당시 구호사업의 일환으로 박문사(현 신라호텔)와 불법연구회 구호소 건물 등 적산가옥을 인수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산 종법사는 “정각사(약초 관음사)만으로 만족하다. 구호사업을 잘하는 것은 썩 좋은 일이나 땅이나 물건을 소유할 욕심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 이라며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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