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교무의 서울교화 창립유공인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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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성교무의 서울교화 창립유공인들 1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5.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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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타원 민자연화 정사

원기 20년 1월호인 <회보> 제14호 「경성지부 연혁 상황」에 의하면 소태산 대종사는 민자연화, 이현공, 박공명선, 김낙원, 이동진화, 이성각, 이공주, 이정원, 심오운, 이철옥, 성성원, 김삼매화, 지환선, 박보순화, 신원요, 진정리화(기자의 실수로 이름이 빠졌음을 다음호 광고란에 밝힘)를 경성지부 창립주라 하였다. 또 16인 이외에 김영신, 조전권도 정신 육신으로 노력하였다고 했다. 경성출장소 제2대 교무를 역임한 정산종사(송규)는 새 회상 제1대 제1회 12년의 역사를 기록한 <불법연구회창건사>에서 ‘경성출장소 설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경성은 갑자(甲子)이후로 회원이 점차 증가되어 독신자(篤信者) 10여 인이 있었으나 총부와 거리가 너무 멀어 모든 회원이 이를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던 바, 7월경(원기 11년 음)에 이동진화의 특지로 부내(府內) 창신동 605번지에 목조 초즙 5간 1동과 4간 1동을 대지 병합하여 시가 1천여원 가치를 의연함에 따라 동진화와 당지 회원 이공주, 민자연화, 이성각, 박공명선, 이현공, 성성원, 이정원, 심오운, 김낙원, 이철옥 등이 병력(竝力)하여 유지비를 부담하고, 김삼매화는 헌신적으로 직접 치산을 자담하여, 장소와 유지 계획이 대강 완성된 후 총부에 교무 파송을 요구하므로, 서무부 서기 송도성을 동소(同所) 교무에 임명하여 경성에 파견하였다.


경성출장소 창립과 발전에 정신·육신·물질 삼방면에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이공주는 원불교 제1대 성업봉찬회 회장으로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를 정리하며 경성출장소 창립 발기인을 13인이라 밝혔다. <불법연구회창건사>에 기록된 12인 이외 1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박보순화로 추정된다. 박보순화는 원기 10년 이동진화의 인도로 입교한 믿음이 독실한 회원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출장소 창립 발기 13인과 경성출장소 발전과 돈암동 회관 신축 등에 공이 큰 지환선, 신원요, 진정리화 3인을 합한 16인을 경성지부 창립주라 하였다.



구타원 이공주 종사 모친


경성출장소 창립 발기 13인 중 한 사람인 낙타원 민자연화는 서울 서린동에서 부친 민덕현 선생과 모친 함씨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민자연화는 14세경부터 홀로 된 이모가 불법을 신봉하는 것을 보고, 불법을 믿게 되었다. 18세에 이유태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법도 있는 교육과 시대에 맞는 교육시킨 후 모두 결혼시켜 원만한 가정 생활을 하게 하였다. 민자연화의 나이 50세에 백용성 스님이 인근 봉익동에 대각사(大覺寺)를 설립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15년간을 믿고 수행하였다.


원기 9년 소태산 대종사 두번째 상경길에 민자연화는 장녀 이성각 차녀 이공주와 함께 창신동 이동진화의 수양채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왔다. 소태산 대종사가 찾아온 이유를 묻자 민자연화는 ‘삼세일’을, 이성각은 ‘정도와 사도’에 대하여, 이공주는 ‘삼세일과 정도와 사도’ 두가지 일 모두를 알고 싶다고 하자 소태산 대종사는 모두 알려 주겠다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와 숙겁의 인연은 이렇게 해후하게 되었다. 그 당시 민자연화와 이성각은 대각사 백용성 스님에게 불명을 받아 이공주만 법명을 받았다.


민자연화는 이듬해 초 이공주의 연원으로 법명을 받고, 소태산 대종사를 생불님으로 받들며 청법낙도 하였다. 민자연화는 68세에, 원기 11년 경성출장소 창립을 위한 13인의 발기인 중 중요인물로 참여하여 이듬해 정월 초하루부터 매일 아침공부를 시작할 때 소태산 대종사 계시는 남쪽(익산총부)으로 예배를 올리는 정성을 쉬지 않았다.


원기 15년부터는 매일 염불, 혹은 좌선을 6~7시간, 경전 연습을 1시간씩 하였으며,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때 법위가 예비특신급에 올라 불비시수면(不非時睡眠)의 계문을 받아 정식으로 잠자는 시간 외에는 절대로 자리에 눕는 일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계문을 준수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민자연화가 가까이에서 식사수발을 하며 소태산 대종사를 공양하고 남은 밥을 즐겨 먹었다. 이와 관련된 법문이 <대종경> 변의품 16장이 되었다.


민자연화가 원기 17년, 74세로 열반하자 익산총부에서는 경성지방 지방장(地方葬)으로 결정하여 총부 대표로 전음광을 파견하고 신정예법에 의하여 추도식 및 착복식을 하였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때 민자연화는 재가 회원 중 2등 전무주력자와 공부는 예비특신부, 사업은 5등 유공인이었으며, 원기38년, 제1대 성업봉찬회시 공부는 정식 법마상전급, 사업등급은 거진출진 정3등으로 원성적 정3등이었다. 원기 73년 제2대 말 성업봉찬시 공부성적을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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