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구-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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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구-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5.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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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타원 이공주 종사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나의 법을 가장 많이 설해 주었다. 공주는 나의 법낭(法囊)이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법낭’이란 아호를 받았던 구타원 이공주는 서울 대묘동에서 부친 이유태 선생과 모친 민자연화 정사의 3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6세부터 부친에게 한글을 배웠고 이화학당 초등부에 입학, 기숙사 생활을 하며 영어·성경 등을 배우고 외삼촌이 교장으로 있는 동덕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동덕여학교 수학 중 외삼촌으로부터 창덕궁 여관시보(女官試補)로 추천을 받아 조선 마지막 황후 윤비(尹妃)의 시독(侍讀)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만 4년간 궁중생활하며 궁중법도와 한문·일어 등을 전공했다.


한일합방 후 1913년 18세에 퇴궁(退宮)하여 경성여자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하여 졸업 후 일본 유학을 하여 문학박사가 되려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꿈은 무산됐다. 이공주는 21세에 박장성과 결혼하여 아들 창기(묵산 대봉도)와 원기를 두었으나 결혼 8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원기 9년 소태산 대종사 두 번째 상경 길에 모친 민자연화, 언니 이성각, 조카 김영신과 함께 불법연구회에 귀의하였다.


27세의 나이로 남편과 사별한 후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소태산 대종사는 ‘공주(共珠)’라는 법명을 주며 “세계 인류가 모두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어 달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원기 10년 소태산 대종사가 “공주는 앞으로 어떤 큰 일을 하고 싶소?”라고 물었을 때 이공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문학박사가 되어 1천만 조선 여성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는 “도덕박사가 되어 세계 전체의 여성, 나아가 세계 전체 인류를 제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라며 말렸다.


이공주는 경성출장소가 설립되기 전인 원기10년부터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경성 주무로 임명되어 원기 11년 경성출장소를 설립하는 발기인의 중심이 되어 출장소 설립에 큰 공을 세웠으며, 소태산 대종사 상경하여 활동하는 경비를 대부분 자담하였다. 원기 15년부터는 재가로서 경성출장소 교무로 전력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가장 많은 법문을 설하였고, 이공주는 ‘약자로 강자되는 법문’ 등 많은 법문을 수필하여 《대종경》 편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이공주는 경성출장소 발전에 정신 육신 물질 삼방 면에 경성 회원 중 가장 많은 노력을 하였다. 원기 17년에는 자신의 계동 사가를 방매하여 돈암동 새 회관 터를 매입하고 모친 민자연화와 차자 박원기가 열반하자 장남 박창기와 함께 출가하였다. 그 후 익산총부에서 생활하며 소태산 대종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셨다.


또한 이공주는 박창기와 함께 물려받은 1천여 마지기의 유산을 교단 경제 운영에 적절히 사용하였다. 각종 초기교서 인쇄비용과 <회보> 발행비용이며 총부 대각전 신축, 제1대 성업봉찬사업 등에 정재를 희사하였고, 그 후에도 많은 교단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 했다. 원기 16년 여자 수위단을 경성에서 조직할 때 중앙위에 선임된 이후 줄곧 그 자리에서 소태산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 3대 주법인 역대 단장을 보필했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 시 이공주의 공부는 특신부, 사업은 정2등의 유공이었으며, 제1대 내 창립유공인 중 특별창립유공자 즉 법훈 해당자가 되어 원기 42년 개교기념식에서 대봉도 제1호의 법훈을 받았다. 부군 박장성, 장자 박창기, 차자 박원기 등 일가족 4명 모두 창립 유공인이 되어 정산종법사로부터 특별 공로 표창을 받았다. 이공주는 원기 73년 제2대 말 성업봉찬 대회 시 종사위에 승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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