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원 이성각 정사-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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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원 이성각 정사-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6.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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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

경성출장소 창립을 위한 발기인 중 한 사람인 기타원 이성각은 서울 인의동에서 부친 이유태 선생과 모친 민자연화 정사의 3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생활하다 17세에 동갑의 김일환과 결혼하여 현신, 영신 자매를 두었으나 23세 때 부군이 열반하여 부모님의 주선으로 친정에 돌아와 두 딸을 양육하며 살았다. 모친 민자연화를 따라 대각사를 다니며 백용성 스님의 지도 아래 독실한 신심으로 불제자로서 지켜야 할 일과를 모두 지키며 생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두 번째 상경시인 원기 9년 10월에 박사시화의 인도로 창신동 이동진화의 수양채에서 모친 민자연화, 동생 이공주와 함께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다녀간 쌓인 소원을 일시에 성취한 듯 기뻐하였으나 대각교를 다니며 백용성 스님에게 불명을 받았으므로 법명을 받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 이공주의 연원으로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법명을 받아 3대 4모녀가 소태산 대종사를 생불님으로 받들었다.


이성각은 모친 민자연화, 동생 이공주와 함께 경성출장소 설립 발기인이 되어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경성출장소 발전에 노력하는 한편 차녀 김영신을 전무출신시켜 여성지방교무 1호로 새 회상에 헌신할 수 있도록 뒷받침 했다. 또한 이공부 이 사업에 일생을 바치기로 서원하고 소태산 대종사 상경시 청법낙도하는 가운데 언제나 극진히 사봉하며 소태산 대종사 익산총부로 가기 위해 경성역에 갈 때는 전송을 위해 항상 서울역까지 다녔다.


경성출장소가 돈암동에 새 회관을 건축할 때 오창건이 감역하고 소태산 대종사도 2차에 걸쳐 상경하여 회관 건축을 감역하였다. 이성각은 딸 김영신과 함께 회관건축현장으로 거처를 옮겨, 소태산 대종사, 옥사위원 오창건, 경성교무 이완철, 그리고 정일지 등의 식사와 의복을 맡아서 담당하여 회관 건축을 음으로 도왔다.


이성각은 김영신이 출가하여 남부민·초량지부의 교무를 거쳐 개성출장소 교무로 부임하자 원기 24년에 출가하여 개성출장소 감원으로 임명되어 김영신의 교화를 보조하며 삯바느질 등을 하며 초창 살림을 도왔다. 원기 26년부터 3년간 총부 세탁부원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의복을 만들었으며, 경성출장소 제2대 교무였던 정산 송규 교무가 종법사에 취임하자 정산종사의 의복 일체를 담당하였다.


경성지부 창립 유공인임과 동시에 새 회상의 알뜰한 유공인 이성각은 원기 38년 제1대 성업봉찬시 공부는 정식법마상전급, 사업은 준1등으로 원성적 정2등에 올랐다. 원기 73년 제2대 말 성업봉찬시 이성각의 공부성적을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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