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원 박공명선 정사-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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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원 박공명선 정사-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6.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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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외동딸인 성성원과 함께 경성출장소 창립 발기인이 되었던 미타원 박공명선은 전북 남원에서 부친 박규록 선생과 모친 이씨의 3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박공명선은 쌍동이 언니인 박사시화와 함께 성장하여 20세에 같은 지역의 성재환과 결혼하여 6녀를 모두 잃고 7녀 성원 만을 양육하였다. 남편이 경성임시토지조사국판임관으로 전직되자 서울로 이사하여 생활하다 54세에 남편이 죽자 쌍둥이 언니인 박사시화의 도움으로 성원을 교육시키고 생활하다 성원을 전북 임실 출신인 진대익과 결혼시킨 후 계동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박공명선이 58세때, 원기 9년 음 2월 25일 소태산 대종사 몇몇 제자와 처음으로 상경하여 서울역 인근 태평여관에서 하루 밤을 지낸 이튿날 박사시화가 박공명선이 살고 있는 성성원의 계동집으로 모시었다. 그 날 쌍둥이 자매인 박사시화와 박공명선이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서울 최초의 제자가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성성원의 집에서 2~3일을 머문 후 당주동에 경성임시출장소를 정하고 거처를 옮기자 당주동을 찾아 박사시화와 함께 시봉하며 청법낙도 하였다.


박공명선의 나이 60세, 원기 11년 경성출장소 설립을 위한 발기인 13명 중 한 사람으로 동참하여 매월 일정액의 유지비를 부담하였으며, 소태산 대종사와 회중 생각하기를 지극정성으로 하였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자신의 곤란함도 불고하고 동정하였다.


박공명선은 원기 12년 익산본관 제6회 정기훈련 즉 정묘동선에 쌍둥이 언니인 박사시화와 같이 입선하여 수선하던 중 12월 18일 회갑을 맞이하여 쌍둥이 자매의 회갑식을 성대히 베풀고 기념 촬영까지 하였다. 이 사실이 당시 ‘동아일보’에 사적(史蹟)과 함께 게재되었다. 원기 14년 경성출장소에서 은부모시자녀의 결의법에 의하여 이출진화를 시녀로 정하였고, 64세, 원기 15년에 발병하자 박사시화가 상경하여 간호하였으나 회생하지 못할 줄을 안 그는 친녀 성성원을 불러 “내가 죽은 후라도 종사주께 더욱 정성을 더하고 이모님(박사시화)을 나와 같이 극진히 시봉하라. 내가 평소에 금전이 없어 사업계에 보조를 못한 것이 철천의 한이니…”라고 유언하고 고통 중에도 염불을 하며 열반하였다. 박공명선이 열반하자 익산본관에서는 경성지방장으로 결정하여 경성출장소 회원들이 착복하고 장지까지 함께 다녀와 치상절차를 마쳤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 때 박공명선은 경성회원 10여인과 함께 참석하였다. 공명선의 공부는 예비특신부, 총공금(總功金)은 131원 36전으로 정6등이었으며, 원기 38년 제1대 성업봉찬 때 공부는 정식법마상전급, 사업은 거친출진 준3등으로 원성적은 준3등이었다. 원기 73년 제2대 말 성업봉찬 때 박공명선의 공부성적을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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