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타원 이동진화 종사-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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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타원 이동진화 종사-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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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5


자신의 수양채를 희사하여 경성출장소를 설립케한 육타원 이동진화는 경남 함양에서 부친 이화실 선생과 모친 김씨의 5남매 중 3녀로 태어났다. 이동진화는 5세 때 부친을 사별하고 진주에 가서 생활하다 이궁가(李宮家) 종친(宗親)인 이규용의 소실(小室)이 되어 물질적으로 아쉬움 없이 풍족하게 지냈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뜻에 맞지 않아 극도의 신경쇠약, 위장병과 두통으로 고생하였다.


원기 9년 소태산 대종사 처음 상경 때 박사시화의 인도로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뵈올 때에 비록 소실 이긴 하나 궁가의 지체라며 머리를 굽혀 예배치 아니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그녀의 인물이 비범함을 인증하고 “사람이 세상에 나서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과 대도를 성취한 후에 중생을 건지는 일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큰 일이 된다”고 하였다.


이동진화는 엄숙하고 정숙한 말씀에 크게 깨친바 있어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이동진화는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에서 전라도로 내려가자 일생을 수도에 전념할 것을 발원하여 침모(針母)인 김삼매화와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나섰다. 전라도에서 도인이라면 진안 마이산 도인 일거라는 말에 마이산을 찾아 이인(異人)을 만나기도 했다.


다시 수소문 끝에 길을 묻고 물어 다행히 찾아간 곳이 소태산 대종사가 10여 명과 선(禪)을 나고 있는 만덕산 깊은 산 속 만덕암이었다. 만덕암에서 소태산 대종사께 동진화(東震華)라는 법명을 받고 선을 한후 1개월여 만에 집으로 돌아오자 부군이 서울 동대문 부근에 조용한 처소(창신동 605번지)를 마련하여 수양처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동진화는 익산총부가 건설되자 원기 10년 수도생활을 할 준비를 갖추어 김삼매화와 함께 총부로 내려와 제1회 정기훈련을 났다. 그 후 원기 11년 자신의 수양채를 교단에 희사하여 경성출장소가 설립되도록 하였다.


이동진화는 원기 15년에 소태산 대종사 금강산 탐승에 함께 하였으며 원기 16년 소태산 대종사 경성출장소에서 최초의 여자 수위단을 조직할 때 곤방위(坤方位)에 선임되었다. 경성출장소가 설립되자 출장소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다 원기 18년 출가하여 경성출장소 여자담당교무로 임명되어 4년동안 교세를 넓혔으나 건강이 여의치 않아 요양하다가 원기 27년부터는 경성지부 순교무로, 다시 31년에는 교무로 근무하면서 경성의 많은 회원을 얻었다.


원기 32년 총부 순교감을 거쳐 원기 33년부터 3년간 서울지방 교감으로 봉직하며 춘천에 출장하여 지부설립의 기초를 세웠다. 원기 35년(1950) 한국전쟁 때에는 솔선하여 서울지부를 지키는 책임을 맡아 갖은 난관을 극복하며 식당채가 폭격을 당하면서도 사수하였다.


말년에는 총부 금강원에서 수도하며 교단의 자애로운 어머니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젊은 여자 학원들의 자모(慈母)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지도인이었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시 이동진화의 공부는 특신부, 사업은 정1등 유공인 5인 중 2호에 해당되었으며, 원기 38년 제1대 성업봉찬시 공부는 예비법강항마위, 사업은 정특등으로 원성적 준특등이었다. 원기 53년 열반시 공부성적을 정식출가위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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