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 송규 종사 , 훈산 이춘풍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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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송규 종사 , 훈산 이춘풍 정사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12.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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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성 교무의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15

정산 송규 종사


소태산 대종사가 28년간 인류구원 사업을 하다 열반하자 법통을 이어 원불제 제2대 종법사에 오른 정산송규는 경북 성주에서 부친 송벽조 대희사와 모친 이운외 대희사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규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나 마음속에는 큰 스승을 만나 공부를 하겠다는 구도적 열정이 심화되어 전라도까지 오게 되었다.


이 무렵, 소태산 대종사는 영광에서 제자들을 10인 1단의 교화단으로 조직하고 “중앙 단원은 뒤에 멀리서 올 것이다”며 기다리다 원기 3년 정읍 화해에서 송규를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소태산 대종사는 “나는 이제 근심을 놓았다. 나의 법을 전해 줄 법주를 만났다.”고 하였다.


약관 19세로 수위단 중앙에 서임된 송규는 원기 4년 법인성사를 동지들과 나툰 후 전 가족을 전라도로 이사시켜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시켰다. 소태산 대종사의 명에 따라 부안군 변산 월명암으로가 백학명 선사의 상좌로 있다가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에 입산하자 교서 편찬을 보좌하였다. 또한 변산에서 만덕산을 가는 등 창립 인연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다가 익산총부 건설에 동참하였다.


원기 12년 봄 총부인사에 의해 총부 연구부장이었던 송규는 동생 송도성의 후임으로 경성출장소 제2대 교무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러나 1년만인 원기 13년 「불법연구회」 제1대 1회 총회에서 송규는 영산지부장으로 전임되었다. 송규는 이때부터 영산에서 새 회상 기초를 다졌는가 하면 영산과 총부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명에 따라 《정전》 편찬과 교정전반에 보필의 역할을 다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여 종법사 위에 오른 송규(정산종사)는 1945년 광복 후 혼란 속에서 「불법연구회」라 불리던 임시교명을 「원불교」라는 정식교명으로 세상에 선포하였으며, 전재동포구호사업을 펼치고 《건국론》을 저술, 민족과 국가의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정산종사는 원광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사업을 전개, 새 회상과 민족발전의 터전을 닦아가는 가운데 교재정비(敎材整備), 기관확립(機關確立), 정교동심(政敎同心), 달본명근(達本明根)의 4대 경륜을 세우고 실천하다가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게송을 전하고 원기 47년 63세로 열반하였다.


정산종사 열반 후 교단에서는 정식대각여래위로 추존하였다.



훈산 이춘풍 정사


유학자로 고종 사촌 동생인 정산종사의 인연으로 새 회상 창업기에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어 봉래제법시절 가까이 모시었고, 5년이라는 짧은 전무출신을 하는 동안 초기 교단의 교리형성과 훈련기반을 굳히는데 큰 역할을 한 훈산 이춘풍은 경북 김천에서 부친 이현옥 선생과 모친 김씨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춘풍은 원기 6년에 고모부 되는 송벽조의 인도로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불법의 대의와 인도상요법을 듣고 유가의 규모를 벗어나 그해 음 12월 25일 가족을 대동하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하였다. 이사한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종곡은 변산으로 드는 초입에 있는 마을이다.


이춘풍은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 대종사께 법을 묻고 가르침을 받드는 한편 영산·변산간 노정의 유숙처로 집을 활용하고 소태산 대종사와 그 제자들의 시봉을 맡아 했다.


소태산 대종사 하루는 이춘풍가에 왔다가 이춘풍과 내소사를 구경하고 험한 청련암 뒷산을 넘어 봉래정사로 오며 일행삼매(一行三昧)법문(대종경 수행품 34장)을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모친 열반으로 영산에 몇 달 근무 할 때 소태산 대종사와 정관평을 둘러보며 왜 방언을 막으라 하였는가에 대하여 문답(대종경 서품 10장) 하기도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춘풍의 두 딸 이경순·정화는 후에 출가하여 교단의 큰 재목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이춘풍은 소태산 대종사가 익산총부를 건설하자 봉래정사를 수호하는 한편 원기 7년부터 12년까지 봉래산에 살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연구한 《산중풍경(山中風景)》을 저술, 초기 교단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기기도 했다. 이춘풍은 출가하여 정기훈련에 여선원(女禪員) 교무로 임명되었다. 여선원 교무로 제 2회 정기훈련부터 제6회까지 근무하며 당시 모든 교법이 두루 완비하지 못하고 더욱이 여선원에 입선하는 입선인 중에는 국문과 한문에 능하지 못해 이해력이 없음에도 이춘풍은 열의로 지도하여 차차 국문에 순숙되어지고, 한문에도 이해가 생겨나서 취지규약을 열독할 정도까지 되었으며 교과서 연습에도 방향을 얻게하는 등 여선원 진로를 개척하였다.


이춘풍은 경성회원들을 여선원에서 지도한 인연 등으로 원기 13년 53세에 제 1대 제1회 총대회에서 경성출장소 교무를 임명되어 송규 교무에 이어 경성출장소 제 3대 교무에 임명되었다.


이춘풍은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존칭을 「종사주」 전무 출신에 대해 「교무」 호칭을 통일하는 의견을 내어 통일시켰다.


이춘풍은 경성출장소 교무를 근무하던 중 원기 14년 어려서부터 잠재해 있던 냉복병이 발작하여 치료를 하였으나 점점 심신이 쇠약해져 부득이 경성교무를 사임하고 총부로 귀한하여 요양하다 부안 변산 봉래정사 자택에서 원기 15년 말에 열반하였다. 원기 73년 제2대 말 성업봉찬시 이춘풍의 법위를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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