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 교무의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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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성 교무의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16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2.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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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팔산 김광선 대봉도, 응산 이완철 종사

소태산 대종사 입정삼매시 지극히 간과한 생활을 하자 식사 등 물질 또는 정신적으로 살림을 보조하고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하다 대각을 이루자 전일에는 호형호제하던 12살 아래인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으로 받들고 첫 제자가 된 팔산 김광선은 영광 영산에서 부친 김응오 선생과 모친 강씨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소태산 대종사 대각을 이룬 후 김광선을 불러 친히 많은 문구(文句)와 시가(詩歌) 등을 불러주며 수필 편집케 한 것이 《법의대전》, 《백일소》 등이 되었다.


김광선은 9인 제자 중 으뜸가는 기력과 가정 형편도 제일 넉넉하여 정신·육신·물질 삼방면으로 방언공사에 솔선수범하였다. 방언작답 후 어느 때는 제방이 무너져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와 막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인력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며 바닷물에 뛰어들어 이를 막았다.


김광선은 원기 8년까지 영산에서 방언답을 관리하며 영산성지 일을 돌보던 중 정읍 내장사에 5인 선발대를 파견 할 때 그 일원이 되어 출가하였다. 원기 9년 이리 송학리 박원석의 집에서 오창건·이동안 등과 더불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산업부의 시초가 되었다. 원기 10년 부터는 익산총부에 거주하며 만석평의 농사를 짓는 산업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원기 14년 경성출장소 교무 이춘풍이 신병 때문에 익산으로 귀관하자, 소태산 대종사 경성회원 이공주에게 경성출장소를 임시 관리도록 하였다가 그 해 11월 김광선을 경성출장소 교무로 임명하였다. 경성출장소에서 근무 시 근검절약을 신조로 초창기 어려움을 극복하였으며 이듬해 총회에서 마령출장소 교무로 임명되어 짧은 기간동안 경성출장소의 교화를 마치고 귀관하였다.


마령출장소는 창설 초 빈한한 교당이라 유지대책이 없자 교도들을 교리 훈련시키는 한편 친히 전답 개조, 수박 재배, 과수원 경영으로 교당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교도들과 지역사회에 수박 재배 등 선진 농업을 전수하였다.


김광선은 소태산 대종사가 가장 허물없이 가까이 대하고 정이 깊은 든 제자로 일호의 사심 없이 공중사에 헌신 봉공하다 원기 24년 「영성지부」에서 61세로 열반하였다.


원기 42년 개교기념일에 임시법훈증 수여식에서 정산종법사는 김광선에게 대봉도 법훈증을 수여(장남 김홍철)하였다.




경성지부 교무로 12년간을 근무하며 한결같은 신성으로 교화에 주력하여 경성교화에 기틀을 다졌으며, 불법을 물 쓰듯이 활용하고, 항상 겸양으로 상하를 두루 살피되 아래에 처한 사람을 더욱 챙겨 인화를 이끌었던 응산 이완철은 영광 신흥에서 부친 이강현 선생과 모친 김낙일화 여사의 5남 2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이완철은 원기5년, 24세에 친형 이동안의 인도로 영산 구간도실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뵙온 후 여러 가지 법문을 받들고 제자 되기를 서원하고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형인 이동안이 이미 출가한 관계로 가정 사정과 출가를 서두르지 말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뜻에 따라 묘량수신조합 발전에 솔선하였다.


원기 12년에 신흥에 불법연구회 회관을 세우기로 작정하여 이완철 일가가 먼저 뜻을 모아 신흥출장소를 설립하였다. 신흥출장소는 원기 9년 익산총부 건설 후 경성출장소에 이어 두 번째 창설된 것이었다.


이완철은 원기 15년 34세에 가정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출가하여 총부 농업부원으로 근무를 시작해 총부 교무부 학원 교무를 거쳐 원기 18년에 경성출장소 교무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경성출장소 교무로 부임할 당시 경성출장소 상황은 창신동 회관이 장소가 협소하고 불편하여 새 회관 건축이 다녀간 현안이 되어 낙산 넘어 돈암동에 이공주의 희사로 회관부지를 마련하고 회관건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완철이 부임하고 회관건축이 진행되어 총부에서 오창건이 건축위원으로 상경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 건축 공사 중 소태산 대종사 2차에 걸쳐 상경하여 감역을 하기도 했다. 이완철은 경성출장소 교화를 하는 한편 회관 건축 공사에 열과 성을 다하여 그 해 음 9월 새 회관을 완공하고 낙성식을 가졌다. 경성회관은 새 회상 건축에 있어서 단독으로 건축된 법당의 효시이며, 가장 큰 건축물 중의 하나였다.


이완철이 경성출장소 교무로 부임하기 전까지 역대 교무들은 1년 혹은 2년 근무하고 이임을 했다. 그러나 이완철은 원기 30년 영산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이임하기까지 12년간 경성교화를 이끌었으며, 새 회관이 건축되자 매년 동하선을 개최하여 공부로 경성교화의 틀을 다졌다.


이완철은 영산지부장과 총부 교감 등을 거쳐 원기 44년부터 교정원장으로 정산종사를 보필하여 교정을 이끌다, 원기 47년 1월에 정산종사가 열반하자 종법사 대행으로 제3대 김대거 종법사가 취임하기까지 교단을 이끌었다. 그 후 대산 김대거 종법사를 보필하다 원기 50년에 열반하였다.


원기 73년 교단 제2대 말 성업봉찬시 공부성적을 정식출가위로 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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