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와 한국인의 문화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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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와 한국인의 문화정체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6.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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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장관 초청강연



우리는 세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 가족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더 나아가면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정체성. 이 세 가지가 원불교에서의 둥근 원처럼 작은 원이 점점 커져 지구의 크기만큼 되기도 하고 때로는 줄어들어서 작은 하나의 원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정체성이란 것은 막연한 것 같지만 색깔, 모양에서 서양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 서양은 별 하나에서 뿔난 오각형을 보았고, 우리는 둥근 단추처럼 보았다. 이런 것들이 문화적인 차이다. 즉 자연으로서 인간은 똑같지만 문화는 다르다.


세계 공통 표시인 비상구의 아이콘을 보자. 남자의 모습이며 초록색으로 해 놓았지만 한국의 초록은 청과 녹색이다. 즉 green과 blue를 같은 색으로 본다. 그런데 서양에서 blue와 green은 아주 다르다. 교통신호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청색신호라 하지 않고 green sign 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색 신호등으로 부른다.


이렇게 모든 상징이 아주 사소한 것 같은데 다르다. 원불교의 정체성이 동그라미, 흰옷, 까만 옷에 나타나 있듯이 그것을 보면 ‘아 원불교, 아 정화인들’ 하고 알 수 있다. 문화란 것은 자연에는 없는것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요즘 한국인들이 촛불집회하면서 사회개벽 하는 것,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곁을 보면 고쳐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교통신호만 보아도 사회적 아이콘이 남자 중심으로 되어 있다. 또 영어를 보아도 남자를 man 여자를 woman 이라 부르니 얼마나 억울한가.


이 두 단어가 합쳐져 융합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가 하나를 먹어버린다. 두 개가 서로 이질적이며 여전히 한 녀석이 하나를 지배한다. 하나가 하나를 제패하는 이런 서양문화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혁명이 안 일어 날 수 없다.




# 우리 문화는 보자기 문화


한국말은 서로 다른 것끼리 합쳐지는 말이 많다. 예로 서양의 엘리베이터(elevator)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는 뜻이지만 우리나라는 승강기라 표현한다. 그리고 서양은 우리처럼 보자기로 싸는 문화가 없다. 한국문화는 보자기 문화이다. 보자기는 이것저것을 다 쌀 수 있는데 가방은 안 된다. 보자기는 싸고 덥고 깔고 메고 하면서 모양이 변하는데 가방은 빈 가방이나 가득 찬 가방이나 모양의 변화가 없다.


‘보자기처럼 사느냐 가방처럼 사느냐’처럼 서양문화와 한국문화 다르다. 서양문화는 서로 대립되지만 한국문화는 서로 통한다. 한국문화의 위대성은 이것이다, 저것이다가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말에서 ‘시원섭섭’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가령 친구가 찾아와 일주일 되어도 안가면 왜 안가지 하면서 어느 날 친구가 가면 시원섭섭하다는 마음과 정을 한 번에 표현한다. 한국문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뜨뜻 미지근 문화 같지만 한 번에 자를 수 없는 융합 이렇게 우주를 끌어안는 그 마음의 문화이다.




몇 천년동안 세계를 제패했던 여진족 은 지금 흔적도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흔적도 없다. 지금 몽고피를 가진 사람은 한국사람 밖에 없으며 남의 나라 백성에 피눈물 흘리지 않게 하고 가슴에 못 박지 않고 사는 민족도 한국인 밖에 없다.


한국인 문화는 싸우는 문화 죽이고 지배하는 문화가 아니라 가위 바위 보 같은 것이다. 가위 바위 보 해서 제일 잘난 것이 누구냐. 누가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비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를 하나하나 찾아보면 우리조상이 못난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는 데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의 흥덕사 종은 세계에서 제일이다. 중국은 크기만 하지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흥덕사 종의 자비로운 소리는 멀리가고, 울림의 범위에 있는 생명들의 삼천년 소망을 이루게 한다.



# 원융회통 사상이 중심


원융회통 원이란 끊고 맺고 낮추어지고 없다. 한국의 평등사상이란 것은 배운 사람이건 배우지 않는 사람이건,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이 세상 생명을 가지는 것들은 모두 존귀하다. 춘하추동처럼 우리 생명이 그렇게 둥글게 돌아간다.


그리고 한국문화는 원의 문화가 아니라 한의 문화이다. 한을 풀어보는 것이다. 원수를 갚는 문화라면 벌써 한국은 사라졌을 것이다.


처용가를 보면 역신이 아내를 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조를 읖으면서 춤을 추었다. 분노를 춤으로 모든 번뇌를 내쫓는 원리, 즉 증오를 정으로 감싸 안을 때 내 마음속에 달그림자가 뜬다. 결국 달 그림자가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감동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처용이 역신을 죽였다면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관용, 베풀어 온 정, 모든 그 속에서 전 세계 점점 그런 세계를 향해서 하루가 다르게 움직여 가고 있다.


한국문화에 있어 불만스러운 것은 한국사람의 유별난 정이다. 외국에서 아무렇지 않는 죄를 절대 용서 못한다. 그런데 죄를 짓지 말아야하는데 제일 많이 짓는다.


우리는 몽고인이며 백제를 세운 온조의 후애이면서도 역사의 기록도 없는 비류의 후손이다. 여러분들은 추위를 가지고 몽고반점을 가지고 간도 너머 끝없이 행진하고 있다. 한반도에 주저앉지 않고 그 바다 너머로 간 비류를 생각해 보자. 지도에도 없는 바다, 깨달음의 바다, 원융의 바다, 현실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바다로 간 비류의 용기를 닮아 끝없이 가는 것이 한국의 유전자요, 모순을 가지고 낯선자와 만나고 하나의 절대와 진리, 평화와 만족한 삶을 구하는 그것이 경제대국으로 가는 길이다. 남에게 죄 짓 지고 않고 부모와 자식들과 세파에 시달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결론은 한국문화에 내일은 없어도 모래 가 있고 글피가 있다는 것이다. 끝없이 정진하고 따뜻한 선택된 사람들이라 것을 명심하시길 바란다.


정리 김해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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