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정체성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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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정체성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12.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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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불교 100년 기념 성업회에 바란다, 이준원 교도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正體性)이란 남과 다른 나, 나로서 존재하면서 또 다른 나를 만나 우리를 이루고, 우리 속에서도 나다움을 표현, 행동하면서 진화하는 주체적 신념과 능동적 결단을 말한다.


‘주체적 신념’은 내재화된 가치체계로서 진리관, 사생관, 인생관, 역사관, 국가관, 세계관 등을 형성하는 이념이며, ‘능동적 결단’은 왜곡과 차별, 속박과 굴레, 오만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신념을 용기있게 실현하는 실천 그 자체이다.


신념의 세계에서는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한다(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행동한다). 결단의 세계에서는 행동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나는 행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와 행동은 도(道)와 덕(德), 이(理)와 사(事), 성리(性理)와 솔성(率性)이다.


주체적 신념은 신앙이다. 신앙은 영혼의 뿌리와도 같다. 그래서 사무여한(死無餘恨)이다. 능동적 결단은 수행이다. 수행은 생명의 샘과도 같다. 그래서 영겁불휴(永劫不休)이다.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고, 수행의 샘이 마르지 않을 때 도미덕풍(道味德風)이다.


정체성이 정립될 경우, 개인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개성을, 가정은 뼈대 있는 가풍(家風)을, 기업은 위기 시에 핵심역량이 더 강화되는 사풍(社風)을, 국가는 사회적 공감대와 역사적 동질성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으며, 종교는 인류보편성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다른 종교에서 배울 점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처럼 ‘다종교, 다문화’ 가 공존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국력을 모으기가 상당히 힘든 나라로 보이나, 그 힘을 한 데로 모으는 구심점이 분명하다면 상당한 결집력을 지닌 ‘역동적 한국(Dynamic Korea)’ 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도(道)가 중요하다.


종교의 정체성은 창업 당초에 유전자(DNA)가 형성된다. 가톨릭의 경우, 예수의 부활, 베드로와 바올의 복음전파를 위한 살신성인의 순교 정신이다. 초기 교회당은 신도들의 피와 뼈로 지어졌다. 로마의 지하동굴에서 시작하였지만, 결국에는 로마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원불교 100년을 앞두고 우리는 16세기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등장을 종교와 정치, 사회와의 관계 및 하나의 조직체로서 교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교황청의 신권적(神權的) 권력화는 성직자의 부패와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베드로 성당 건축과정에서 면죄부의 판매는 종교개혁운동에 불을 지르게 된 촉발제가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소태산 대종사께서 ‘불교혁신론’에서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 신념을 밝히시고, 이를 제자들과 몸소 실천에 옮기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 원불교는 교단초기 법인성사(法認聖事)을 통해 순교에 해당되는 역사가 있었고, 일제 치하에서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등이 이런 저런 핍박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원불교의 정체성을 형성하여 왔다.


그런데, 외부 사람들이 보기에 “원불교가 운영하는 기관은 정부에서 돈을 주면 다른 종교단체보다 알뜰하게 사용하더라”는 호평도 있지만 “원불교는 교법은 좋은데, 너무 조용하다”는 평도 있다. 그런데 “조용하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법회 의식(儀式)이 조용하다는 것인가? 신도들의 기질이 내성적이라는 말인가? 타 종교에 비해 시민운동참여가 덜 적극적이란 뜻인가?


명대실소(名大實小)하지 말고 내실부터 다져서 명소실대(名小實大)하라는 정산종법사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바로 무실역행(務實力行)이다. 정각정행(正覺正行)을 통해 성품의 참맛인 도미(道味)를 즐기고, 무아봉공(無我奉公)을 통해 동남풍의 덕풍(德風)을 불려야 한다.




원불교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원불교 100년 기념성업’은 원불교 개교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성당을 지어가던 과정의 면죄부 판매, 조불조탑(造佛造塔)을 자랑한 양나라 무제에게 달마가 깨우쳐 준 ‘무공덕(無功德)’ 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100주년’이 아니라 ‘100년’이라고 한 깊은 뜻을 읽어야 한다. 창업정신을 시대에 맞게 살려가되,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겠다는 혁신적 의지의 표명이다.




1. 후천개벽시대의 미래지향 보편종교


선천(先天)은 갈등과 대립의 음(陰)시대이다. 남녀간, 계급간, 인종간 차별로 그늘진 시대이다. 원불교가 타 종교에 비해서 눈에 띌 정도로 강한 정체성을 보이는 것은 교단 초기부터 존중된 남녀평등이다. 미국의 경우 1869년 와이오밍주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참정권이 주어졌고, 1920년에 가서야 전국적으로 실시되기에 이르른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가정, 사회, 교단 내에서 시대에 맞는 여성의 본원적, 사회적 역할과 참여에 대한 주제가 ‘원불교 100년 기념성업회’(이하 ‘원백’)에서 다루어졌으면 한다.


원백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후천개벽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원불교는 어떠한 종교인지를 구체화하는 이념, 가치, 행동 체계를 밝히고, 자기 혁신적 운영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이다.


“대종사님께서 세세곡절 다 밝혀 놓으시다 보니, 너무 쉽게 교법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원불교 경전 공부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 속엔 실천지향, 미래지향 요구가 담겨 있다.


원불교가 ‘후천개벽시대, 휴먼르네상스시대의 인류보편종교’로서 인증받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과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제일 먼저 할 일은 당연히 경전·교서의 영어 등 주요 국가별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 해외교화 교무 육성 및 현지교당을 통한 현지인 교화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지금은 돌아가시어 성남모란공원에 계시지만 단국대 의상박물관 석주선 여사(그 유명한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의 누이동생)로부터 십여 년 전에 들은 말이 있다.


“주한대사가 한국에 오면 그 부인들이 한국의 문화, 의식주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저의 박물관에 당연히 들리는데, 제가 영어를 할 줄 몰라서 통역을 통해서 안내를 했는데 제대로 전달이 안되어서 제가 손발과 표정을 담아서 안내하니 잘 알아들으시더라구요.”


불교계에서 해외포교의 최고봉인 숭산(崇山) 스님은 영어를 잘해서 하바드 등 미국의 젊은이들로부터 선풍적인 관심을 끌게 하였을까? 아니다. 이는 영어의 문제가 아니고 기운으로 전해지는 ‘내공과 법력’이다.






2. 한국을 ‘정신적 지도국’으로 삼는 종교


원불교는 한국에서 탄생했고, 경전 또한 한글로 되어 있다. 한국은 구한말부터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왔고, 이데올로기 대립 시대의 상징처럼 남북이 분단되어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인류보편종교를 지향하는 원불교 입장에서는 엄청난 도전이요, 기회이다.


한국이 ‘정신적 지도국’이 된다는 것은 21세기 휴먼 르네상스의 허브가 된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 교단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과제이요 비전으로 본다. 따라서 관련 학회, 기관과의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을 제안해 본다.


“너희들은 한문을 너무 숭상치 말라. 머지않은 장래에(한국이 정신적 지도국이 되는 날) 세계 사람들이 한글로 된 우리 경전 공부를 하려고 한글을 공부하는 날이 올 것이다” 고 소태산 대종사께서 전망하신 바, 그 뜻을 살리려면, 글로벌 시대에 당분간은 영어 공부도 잘 해야 하겠지만, 한글 연구가 원백(圓百)성업의 과제로 당연히 들어와야 한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 잊혀져 가는 한글의 발굴, 교전의 완전 한글화 노력, 영어·한글 대조 교전 등의 간행을 위한 한글 학회·기관과의 교류를 기대해 본다. 교전을 영어 등 외국어로의 단순한 직역이 아닌 현지인의 문화, 사회적 맥락(Context)에 맞는 번역이 되어야 한다. 마치 불교가 북방 대승불교와 남방 소승불교로 현지화(Localization)하여 나갔듯이….


그런데, 우리나라가 ‘정신적 지도국’이 되려면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우리 교단이 무언가 해법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금융위기를 맞이 하면서 자본주의는 시련에 봉착한 듯 보인다. 이러한 위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이윤추구동기)에 솔직하면서도 이를 견제하는 도덕적, 법적 장치가 있다.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유롭고 공정한 게임의 법칙(공정거래)’인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를 지나면서 월가 중심으로 ‘금융정보독점자본주의’가 그 정도를 심해가면서 결국 오늘의 금융위기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 원불교 교법은 이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있는가? 나는 그 답을 바로 ‘공부의 요도(要道) 삼학팔조,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에 그 해법이 다빈치코드마냥 감춰져 있다.


앞으로 자본주의의 진화방향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공자주의’ 로 본다. 여기서 공자는 유교가 아니다. ‘공동체 기반 자본주의’ 의 약칭(‘共資’)이다. 윤리경영과 환경경영을 중시하는 공동체 정신…. 혁신경영과 창조경영을 중시하는 기업가 정신…. 이 두가지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계최강의 글로벌 기업인 GE, P&G 등은 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학(三學)공부를 잘 하면 창조와 혁신을 위한 정신적, 사리적, 실천적 에너지가 잘 나올 것이다. 사은(四恩)사상을 잘 실천하면 윤리경영, 환경경영이 잘 될 것이다. 사요(四要)실천을 잘 하면 ‘강약진화(强弱進化)의 도’가 살아나서 강자는 약자를 교육으로 지원하여 강의 자리에 서도록 도와줄 것이고, 약자는 강자를 악의 축으로 몰지 않고 배우려고 할 것이다.




3. 문화창달을 통해 대중이 인증하는 종교


중세 르네상스, 인본주의 문예부흥에 대해 우리는 그 시작과 진행과정, 그리고 미친 영향에 대해 공부를 하고, 배울 것은 배워서 실행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 역사적 사례를 들어 보겠다.


먼저 인재육성이다. 15세 된 미켈란젤로를 피렌체에서 발굴하여 로마로 해외연수를 보낸 메디치가 역사를 기려 본다. 우리 원백이 내년도 100명의 장학생을 선발, 정도에 따라서 장학금을 주고, 그 중 10명의 학생을 3년 후에 해외연수를 보낸다고 상정해 보자. 그리고 원기 100년 귀국한다고 보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하드웨어(장엄불사)에 들어가는 돈을 최대한 휴먼웨어(인력육성)에 아껴서 투자하는 것이 소태산 대종사와 우리 선진님들께서 참으로 참으로 바라시는 바가 아닐까?


두번째는 인류보편종교이다.


우리만 ‘하나의 진리, 하나의 세계’를 내세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원불교가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 종교의 뜻을 통합하되, 과학문명 시대에 맞게 미래지향적, 실천지향적인 교법을 창제하여 이를 알기쉽게, 실생활에 부합되도록 했다는 점이다.


글로벌 시대는 이제 동서양이 없다. 하나의 세계다. 문화가 교류하는 동시대이다. 영육쌍전의 지상낙원시대, 홍익인간의 이념이 구현되는 후천개벽시대의 도래이다.


문화란 인문의 ‘문(文)’, 변화의 ‘화(化)’이다. 선천시대 중국은 하도낙서(河圖洛書)의 문(文)으로 열었고, 기독신앙은 모세가 하늘의 빛을 받은 십계명으로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시절 운수에 따라 무위이화(無爲而化), 창조적 진화의 섭리로 이루어진다.


문화의 속성은 ‘개방성, 포용성, 정립성’ 이다. 일원상 진리에서 공(空)은 개방성이다. 원(圓)은 포용성이다. 정(正)은 정립성이다. 원백에서 할 사업의 주제는 바로 개방성(공), 포용성(원), 정립성(정)인 것이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이다. 서로 다른 이질문화가 교류하는 다양성의 시대이다. 로마제국의 개방성은 그리스의 문화와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국가 성장의 에너지를 확충해 나간 것이다.


서울의 은덕문화원(隱德文化院)이 지어지는 과정을 5년전부터 지켜 보았다.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다. 원불교 교도가 아닌 분들이 관심을 표명한 걸 보고, 어떤 면에서는 참 다행이다 싶었다. 바로 개방성이다. 원불교 잠재고객층을 흡인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창덕궁 옆이라 한국전통문화와도 밀접한 관련성도 갖는다. 여기에 ‘교법의 사회화’ 의 기회가 있다.


포용성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를 탄압하던 바올에 대한 진리의 포용성은 결국 그를 신앙의 중심으로 놓게 한 것이다. 로마 황제 시저의 할아버지는 반란군이었지만 능력중심의 로마사회에서 그는 황제 자리까지 올랐다. 인재의 발굴과 육성은 바로 조직성장의 원동력인 것이다.


문화의 정립성이란 무엇인가? 이는 학문과 예술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중세 기독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만나면서 신학체계가 정립되었다. 불교는 용수가 나오면서 교학체계가 자리잡았다. ‘신앙불교쭭학문불교쭭실천(대중)불교’의 순서로 불교는 발전해 온 것이다.


원백의 문화차원 과제는 무엇일까? 원불교학이 국내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 종교연합(UR)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지, 분파적 과학에 통합적 원리를 비춰주는 도학체계를 정립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때이다.


그리고, 교무님 의상·복식에서부터 우리의 식생활, 교당 건축양식 등 의식주는 물론 음악(성가), 미술(성화) 및 문학에 이르기까지 원불교 문화의 정수를 뽑아내어 이를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 세계화하는 과업에 출가재가의 힘을 총결집해야 한다.


원불교 문인블로그인 ‘마음빛누리에’ (http://cafe.daum.net/mamvision) 를 어느 교무님 소개로 방문해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자생적 블로그들이야말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불교 문화의 생성과 대중화에 큰 힘이 될 것이다.


택시를 타면 원음방송을 듣는 경우가 자주 있다. 기사에게 물어보면 호감을 표명한다. 방송매체의 힘을 느꼈다. 교화 측면은 물론 종교의 사회적 기능인 ‘문화창달’ 측면에서 사이버 커뮤니티와 방송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재미가 있어야 기획이 되고, 흥미가 있어야 실행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원백상상력발전소’를 차려서 ‘참여형 기획 이벤트’를 제안해 본다.


소태산 대종사 십상도(十相圖)에 촛점을 맞추어 보자. 예수 탄생과 복음전파 과정을 동양화로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무대를 미국이나 중동으로 바꾸어 본다면 십상도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천년 후 대종사께서 부활하시고 열반길을 가시고 난 다음에 우리 후손들은 십상도(십이상도?)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십상도를 서사시나 판소리로 표현해 본다면, 뮤지컬이나 오페라로 각색해 본다면, 현대무용으로 연출해 보다면, 교향곡을 작곡하여 연주한다면, 조각상으로 입체화시켜 본다면, 만화를 만들어 대중적 재미를 더한다면,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제작한다면….


소수 프로의 전문성에다가 다수 아마의 진실성이 더해지면서 생기는 결집력, 전파력, 호소력은 인류대중이 인증하는 원불교 문화창달의 동력원이 될 것이다.


원불교100년기념성업의 목표는 ‘인류보편종교로서의 원불교’ ,정신적 지도국으로서 한국’ 임을 세계인으로부터 인증받는 것이다.


원기 100년, 서기 2015년…. 이제 6년 남은 기간이다. 6년 설산(雪山) 등정길 나서는 기분으로, 거듭 태어나는 각오로써,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도하고, 적공해서 내공(內功)을 쌓고, 출가와 재가가 한 마음 되고, 교단과 세계가 한 울안이 되고 보면, 홍익인간의 단군이념과 세계사의 역사정신은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난관에 우리가 서 있을 때일수록 더욱 더 앞길을 살펴 밝혀 줄 것이다.




심인혈성자등명 心印血誠自燈明


도미덕풍진아현 道味德風眞我顯


원백성업법등명 圓百聖業法燈明


일원회상만천하 一圓會上滿天下




스스로 깨쳐가서 마음의 불밝히니


도의맛 덕의바람 참나가 나타나네


원불교 백년역사 진리의 빛밝히니


한이치 일원대도 한권속 일원세계




“법신불 사은이시여! 진리의 빛과 사실의 힘을 저희에게 내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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