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청정교화 최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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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청정교화 최적지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07.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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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장을 찾아서 / 우이동 봉도청소년수련원





그 시절 우이동은 대학생 엠티촌이었다. 강촌이나 대성리까지는 차편을 놓치기 일쑤라서, 늦게까지 버스가 다니던 우이동으로 점차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주말엔 해질녘부터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특히, 군입대 환송 엠티는 꼭 우이동이라, 여기저기서 음정도 박자도 안 맞는 ‘이등병의 편지’가 들려왔다. 다음날 느지막이 퉁퉁 부은 얼굴로 국밥 하나씩 먹고 돌아가는 동네, 우이동은 그런 곳이었다.




# “이 땅이 수도도량이 될 만하다”


그리도 자주 드나들었건만, 원불교 수련원이, 그것도 대종사께서 “수도도량이 될 만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곳에 말끔히 지어져있는 줄은 몰랐었다. 우이동수도원 시절을 거쳐 원기 84년 6월 ‘봉도청소년수련원’으로 개원봉불한 이 곳은, 이공주 종사부터 송원철 교무, 양도신 교무, 이광정 교무, 박청수 교무, 김이현 교무, 박순정 교무 등 선진들의 손길로 조금씩 빚어온 서울교화의 역사 자체다. 무엇보다, 원기 58년 봉산 신원관·도타원 전은덕 대호법이 대종사 말씀 받들어 희사한 3천평이 이 곳의 첫걸음이니, ‘봉도’는 바로 이 두 선진의 법호를 딴 것.


일본인 소유, 그린벨트 문제, 집중호우 피해 등 궂은 일들도 많았던 봉도수련원, 허나 “성현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수련원으로 자리잡은지 만 10년, 최근 ‘먹거리 마을’로 거듭난 우이동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입구부터 등산객이며 동네 주민에게 물었더니 다들 ‘원불교? 바로 여기잖아!’ 하신다. 입구서부터 3백미터, 오른편 하늘에 둥실 뜬 일원상. 바베큐며 탕 요릿집들이 즐비한 가운뎃길에서 작은 다리 건너 산 쪽이다. 얕으나마 물 건너고 높은 나무 지나니 다른 세상인 듯 조용하고 한적하다.




# 대종사 거니셨던 우이령 밟기


“우이령이 40년만에 공개 되어 양주까지 6.8킬로 산책길로 단장했잖아요. 소귀 모양의 우이(牛耳)령은 성적지로도 귀한 곳이지요. 봉도수련원이 수도도량으로서의 면모를 더 갖출 수 있는 복된 일입니다.”


현장 교화·자기 수련 뿐 아니라 수도원 살림까지도 두 손으로 해가고 있는 최선국·윤도심·이제룡 교무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물씬 배어난다. 특히 근접성과 시설이 뛰어난 수련원이 오히려 외부에서 더 유명하고 자주 이용하는 현실이 아쉬운 모양. ‘봉도 교도정기훈련’이야 워낙 오랫동안 검증되고 또 인정받았지만, 교단 내 다양한 조직들과 교당 단위의 모임들에서도 활발하게 이용되길 바라고 있다. 최근, 교도훈련을 했던 교도 중 가족단위로 다시 찾거나, 교당 체육대회를 마당에서 하기도 하고, 몇 단끼리 서너시간 우이령 트래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는 등 다양해지기도 하는 추세.


“유일한 규칙은 금주·금연입니다. 종교에도 차별이 없구요. 금주·금연을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오히려 그것이 좋아서 더 찾으시는 분들도 계세요.”


대각전(강당), 선실, 회의실 및 숙소 14개, 겸용 토의실 8개와 식당이 갖춰진 수련원의 숙식 가능 인원은 105명, 신축 10년쯤 되니 여기저기 손가는 데가 늘어나지만, 도봉교당 청년회나 훈련 났던 교도들이 봉사 하러 와주는 게 큰 힘이 된다. 볕에 이불을 널고 털기만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함께 일하고 둘러 앉아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 한잔 먹는 그 재미에 종종 찾는다고.


“손길 보태주시는 덕에 현장 교화에도 힘이 납니다. 교무를 처음 봐서 ‘저기요~’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부분 가족 같은 분위기에 반해 떠날 때는 먼저 합장을 한다니까요. 대각전이 뭐냐, 일원상이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하구요. 점점 등산객들도 많아지고 있는데, 우리 교도님들 많이 오셔서 이 물좋고 공기좋은 봉도에서 ‘청정교화’ 한번 신나게 해보실래요?”


민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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