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교화를 위한 첫 인연들을 만나고 , - 새 회상의 기지 물색했던 당주동 임시출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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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교화를 위한 첫 인연들을 만나고 , - 새 회상의 기지 물색했던 당주동 임시출장소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9.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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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서울교화의 성적을 따라서



소태산 대종사가 처음 서울에 처음 상경한 것은 원기9(1924)년 3월 30일(음 2월 15일)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안내로 송규, 서중안, 전음광을 대동하고 아침 일찍 이리역(현 익산역)을 출발해 저녁 무렵에야 경성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밤이 늦은 관계로 경성역과 남대문 사이 대로변 우측 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여관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뒤 이튿날 최도화의 인도로 찾아온 박사시화를 만났으며, 그의 안내를 받아 계동에 자리하고 있던 진대익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틀간을 유숙하며 임시출장소 기지를 물색했다. 진대익은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전북 임실 청년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경성 첫 제자가 된 박사시화의 쌍둥이 여동생 박공명선의 외동딸인 성성원 남편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이곳 계동에 머무는 이틀동안 박사시화와 박공명선이 원불교에 귀의해 제자가 되었으며 박사시화는 이 자리에서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그 사이 소태산 대종사를 수행하고 서울로 올라 온 서중안은 전음광을 데리고 다니며 임시로 머물 장소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 앞(현 세종문화회관 뒤편) 당주동에 20여 간 규모의 한옥을 1개월 한정으로 임대해 거처를 옮기고 임시출장소를 열었다. 이곳 당주동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과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당시엔 한옥들이 즐비하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 현재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옛 자취를 짐작해 보기란 쉽지 않다. 전 원불교 서울경기문인회장 이경식 교도가 한울안신문에 ‘서울교화의 성적을 따라서’(1985년 6월 16일 제10호)를 주제로 연재를 할 당시만 해도 일부 한옥이 남아 있어 그 자취를 짐작해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마저 도 사라진 상태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1번, 8번 출구를 나서면 만나게 되는 지역이 바로 당주동인데 현재는 그 한가운데 새문안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고 변호사빌딩과 신문로빌딩 등과 같은 대형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 서울교화의 첫 인연들을 만나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 당주동에 한 달여 간 머무는 동안 박사시화, 박공명선의 극진한 시봉을 받으며, 이동진화를 비롯한 김삼매화, 성성원, 유세련, 이현공, 최만수화 등 서울 교화의 인연들을 차례로 만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궁가의 여인이었던 이동진화와의 만남은 소태산 대종사가 교단 창립의 기반을 닦아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만남이었다. 이동진화는 당시 왕족인 이규홍의 소실로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자신의 신세를 조만간 시들어 버림받을, 화병에 꽂힌 꽃나무라 한탄하며 보내고 있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늘 위장병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던 터였다. 박사시화의 안내로 전라도에서 온 생불님을 만나기 위해 당주동 임시출장소를 찾아 온 이동진화는 처음에는 왕궁가의 여인이라는 자존심을 앞세워 소태산 대종사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으나 대종경 인도품 6장에 실려 있는 법문을 받들고 큰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을 올린 후 바로 새 회상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종사 이동진화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세상에서 할 일 가운데 큰 일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그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중생을 건지는 일이라, 이 두 가지 일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큰 일이 되나니라.”



# 새 회상의 기지를 물색하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와 그 일행이 당주동 임시출장소에 한 달여 간 머물며 무슨 일을 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다만 부안 내변산에 머무르고 있었던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 상경 1년 전인 원기 8년부터 “이 곳은 도로가 험난하여 교통이 심히 불편하고 장소가 또한 협착하니 마땅히 교통이 편리한 곳을 선택하여 모든 사람의 전도(前途)를 열어주심이 시대의 급선무입니다”고 하는 서중안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 회상 공개를 위한 기지를 물색 중에 있었고, 내장사를 새 회상을 펼칠 장소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백학명 선사의 제안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찾아 갔다가 승려들의 반대로 포기한 직후 이뤄졌다는 점에서 새 회상을 공개할 기지를 물색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특히 소태산 대종사의 서울 상경이 새 회상 공개를 제안한 서중안을 대동한 가운데 이뤄졌다는 것과 불법연구회 창립발기인 모임이 서울에서 돌아 온 바로 다음 날인 5월 3일 이뤄졌다는 것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하는 좋은 증거들이다.


그렇다고 보면 소태산 대종사 첫 서울행가시 머물렀던 한 달여 간 머물렀던 당주동 임시출장소는 새 회상을 만천하에 공개할 기지를 물색하기 위한 탐색작업을 펼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새 회상 공개를 목전에 둔 소태산 대종사가 대한민국의 중심이자 서울의 중심이었던 이곳 당주동에 머무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또 일제 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위에 서 있었지만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중심이었던 수도 서울에서 새 회상을 공개할 전진기지를 찾지 않고 다시 익산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하니 이리로 하자”는 말씀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빌딩 숲 어디쯤엔가 있었을 임시출장소의 모습을 가만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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