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듣는 故 송은성 교정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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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듣는 故 송은성 교정 설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9.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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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이여, 죽음을 준비하고 살자

어느새 11월도 중반을 넘어서 12월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낙엽도 거의 다 떨어져서 웬지 마음까지 쓸쓸해집니다. 이처럼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이 이제 한창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청년들과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죽음’에 대해 한번 같이 생각해 보자는 마음이 났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취업준비나 기타 다른 준비로 무척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에 우리 청년들은 왜 교당에 올까? 우리가 다시한번 그 생각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오늘은 ‘젊은이여, 죽음을 준비하고 살자’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한 대학생이 수업이 늦었는지 캠퍼스에서 열심히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한 분이 열심히 뛰어가는 대학생을 따라 같이 뛰어가면서 물었습니다. “학생은 지금 왜 뛰나?” “네, 수업에 늦을까 봐서요.” “수업을 왜 듣는가?” “졸업해야죠.” “그럼, 졸업을 해서 뭐 할건가?” “취업하겠죠.” “취업해서는 뭐할건가?” “결혼하고 아이 낳겠죠.” “그리고 나서는?” “돈도 벌고 화목한 가정도 꾸리고 출세도 해야겠죠?” “그 다음에는?” “아마... 차차 늙고 나중에는 죽겠죠.” “그럼, 자네가 오늘도 이렇게 바쁘게 뛰는 건 결국 죽기 위해서 뛰는 건 아닌가?”


철학자 헤겔은 “인간은 죽기위해서 태어났고 죽기 위해서 살고 있으며 죽음의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는 존재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태어난 이상 죽음을 빼놓고 생각할 수가 없죠. 태어나는 것은 다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지금의 과학발달 정도를 미루어 볼 때 80살 이상은 살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물론 이런 자세도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진정 나의 삶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우리들은 항상 잊지 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예로 사형수가 사형집행을 받으러 가다가 물기가 있는 바닥에서 슬리퍼가 미끄러져 꽈당 넘어졌답니다. 그 때 사형수가 벌떡 일어나면서 “아 죽을 뻔했네”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사형수가 다시 사형수 의자에 앉다가 미끄러져서 또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꽝하고 찧었습니다. 그때 사형수가 또다시 다시 하는 말이 “진짜 죽을 뻔했네”하더랍니다. 물론 이것이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만큼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는 예를 들기 위해 만든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만, 죽음의 문 앞에 있으면서도 “죽을뻔 했네”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죽음을 멀리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제일 첫 번째 해야 할 공부입니다. 정전 일원상 법어에 “삶과 죽음의 이치가 춘하추동과 같이 되는 줄을 알며…”라고 하셨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은 물 흐르듯 흘러 갑니다.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김없이 인간은 자라고 늙고 병들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 나오는 불치병에 걸려 죽을 날을 기다리는 교수가 제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바로 자기가 죽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약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금세 딴 사람이 될걸세.” 우리는 머리 속으로는 이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말 죽음에 대해서 따로 시간을 내서라도 생각하고 느껴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 죽음이란 무엇일까 정말 심도 있게 명상을 한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과 내가 따로 떨어져서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될 수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바쁜 삶 속에서 죽음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습니다.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마다 자기를 알현 할 때 이렇게 인사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황제시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이 황제는 하루하루를‘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내가 죽을 때 사람들은 나를 어떤 왕으로 기억할 것인가’를 항상 경책삼아 국정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출가를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고등학생 시절 신성회 훈련에 갔다가 한 교무님으로부터“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그 죽을 때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잘 살았는지 못살았는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관 뚜껑을 닫을 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부터서 였습니다.


지난번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종교나 인종이나 귀천을 떠나 모든 국민들이 애도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분이 사람다운 삶, 성자로서의 삶, 정말 돌아가시기 아까운, 이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슬퍼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쓸쓸한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똑같은 죽음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요? 누구나 죽는 죽음 그렇지만 그 죽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라는 것을 반드시 잊지 않고 우리가 명상하고 내 것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과연 죽을 때 어떤 여한은 없을 것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누구나 다 죽지만 또 누구나 다 이 죽음이 두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이라는 세계를 다녀와서 그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두려워 할까? 그것은 우리가 생과 사에 대한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천도품 6장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항상 말하기를 생사 고락에 해탈을 하자고 하지마는 생사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해탈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니, 만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회복되는 이치가 없다고 생각할진대 죽음의 경우를 당하여 그 섭섭함과 슬픔이 얼마나 더하리요. 이것은 마치 화재 보험에 들지 못한 사람이 졸지에 화재를 당하여 모든 재산을 일시에 다 소실한 것과 같다 하리라.”


다시말해 우리 영혼이 다시 오는 것을 아는 것은 소실된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있는 화재보험증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는 올 수 없을지라도, 이 죽음 뒤에 다시 올 것을 아는 것입니다. 현자는 말합니다. “생과 사는 눈을 감았다 뜨는 것과,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과도 같다.” 생과 사는 변화는 될지언정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죽음이 끝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를 하게 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천당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고 하는데 정말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그 사람을 구원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원불교는 어떻습니까? 철저히 자기 수행, 자기 공부에 맡겨 놓으니까 교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교도님들께 우스개 소리로 “교도님들은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시려고 하면서 자녀들은 아무데나 태어나도 괜찮으신가 봐요?”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진짜 이 법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어떻게 가까운 자기의 인연들을 이 법으로 인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생과 사의 원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있게 대답을 못하겠죠? 알기위해서 바쁘고 소중한 토요일 이 시간에 교당에 나와서 법회를 보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세계, 영혼이라는 세계, 영식이라는 세계를 하나의 그 무엇이 들어서 생과 사의 변화를 통해 갔다가 또 오고 갔다고 또 오고 합니다. 그때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으나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입니다. 세 번째가 바로 그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는 것이 왜 두려울까? 생각해 봅시다. 그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의 원리에 대해 공부하고 연마하다 보면 나는 그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슴드렸다시피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은 영생을 통해 가져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 열심히 공부한 학문적 지식은 다음 생에 돌아오면 다시 해야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어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무상보시한 그 공덕과 정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는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또 성공을 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생에 이어서 정말 중요한 일은 정말 언제든지 내게 찾아올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 장기 프로젝트를 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5분 정도라도 선과 염불을 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경전연마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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