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토론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선과 악’의 분기점-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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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토론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선과 악’의 분기점-Ⅱ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9.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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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최근원불교종합정보시스템(원티스) 교역자광장을뜨겁게달군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논쟁을 재가, 출가가 함께하는 공개적인 교리 토론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지면으로옮겨왔다.
‘진공묘유의 조화 속에 선과 악은 어떻게발현하는가?’, ‘ 분별성과 주착심도 진리의 작용인가?’하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다함께 참여하고 토론하여 원기 백년을 맞아 자신 성업봉찬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본 기획을 준비했다.
소개된 견해에 이견이나 덧붙일 내용이 있으신 독자들은 A4용지 한 장의 분량(원고지 6매) 으로 투
고(8237452@hanmail.net ) 해 주시면 언제든지 소개하여 진지한 토론을 이어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진공묘유(원만구족 지공무사)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2
김관진 교무 (상동교당)



진공묘유의 동시성과 양면성을 알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성품을 동정 간에 잘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정정요론(定靜要論)을 설하실 때에 성품과 정신과 마음과 뜻을 분석하여 말씀하시기를“성품은 본연의 체요, 성품에서 정신이 나타나나니, 정신은 성품과 대동하나 영령한 감이 있는 것이며, 정신에서 분별이 나타날 때가 마음이요, 마음에서 뜻이 나타나나니, 뜻은 곧 마음이 동하여 가는 곳이니라.”(중략,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2장)
우리는 성품에서 주착심까지 모든 마음을 마음으로 통칭하기도 하고 세밀히는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혹 분별에 끌린 마음, 분별하여 나오는 마음을 나쁜 것으로 알기도 하지만 분별심은 끌리기 전에는 자성과 하나입니다.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는 사람은 부처이지요.
육근을 사용할 때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부처가 아닌 사람은 그렇지 못하므로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바탕인 공적한 영지의 자성광명은 부처와 같지마는 수만생에 지어온 업식과 업장과 업력으로 인하여 가려져서 어둡고, 업식, 업력에 끌리고 업장에 가려져서 그 광명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이 업식, 업장을 녹이는 것이 사참공부요 이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본성을 깨치는 것이 이참공부입니다.
정신이라 함은 원래 마음이 고요하고 두렷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라 하였는데, 경지란 곧 상태로서 정도를 말합니다. 경계를 대하여 자성을 세우는 정도는 각각의 수행과 공부 정도에 따라 다 다릅니다. 진공묘유를 이해하는 정도와 깊이도 다 다릅니다.


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으로 이해하면 나는 마음은 그대로가 진리성입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이 곧 인과의 진리성입니다. 있어지는 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마음입니다. 내는 마음은 나의 몫으로 아는 이는 정진 적공하고 모르는 이는 자행자지 합니다.


나는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려서 경계에 끌리지 말고 원만구족하여 무과불급하고 불편불의하여 지공무사하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경계에서 나는 마음을 온전히 알아차려서 잘 내도록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교강 9조로 내 마음 상태를 본래의 안정된 마음으로 대조하고, 탐진치에서 경계를 발
견하여, 그 경계를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로 챙겨서 온전한 마음으로 원만하게 생각하여 정의롭게
취사를 하자는 것이 정전 마음공부입니다.


마음공부상에서 마음의 가지로부터 뿌리로 들어가는 공부법이나 뿌리로 부터 가지에 이르도록 전체를 이해하는 공부방법이나 결국 일원의 진리인 대소유무 즉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전체적 관점을 세우고 들어가야 교법의 본의와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악(惡)도 자성(自性)을 통해 발현 -2
김형진 교무 (영산성지사무소)


그럼 우리가 현실에서 마음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또한 어떻게 사용해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다고 할까? 표준을 찾아보자면 일원상의 진리구절에서 인거를 한 바가 있고, 일원상 법어와 천지은에서 천지팔도가 이것에 포함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작용을 하는데, 지극히 밝은가? 지극히 정성한가? 지극히 공정한가? 순리 자연한 것인가? 되물어보면 자명한 일이다.
「정전」삼학 정신수양에서는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이름이요”라고 밝혔다. 여기서 마음의 특징을 공적한 가운데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다고 밝혔다. 정전의 말씀 그대로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이 작용하는 그것을 하고자 우리가 이 불문에 귀의한 것이요,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냥 일어나는 마음작용을 다 성품의 작용이라고 편하게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무선무악한 자성의 체를 체득하신 성자들은 마음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그 체에 머물러 계시다가 작용을 할 때에는 어느 한쪽에 물듦이 없이 마음을 내시기 때문에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는 것이다. 자성이 무명에 가리지 않고 현상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일러 묘유라 하고, 삼독심과 무명 업장 업력에 이끌려 이 성품이 가리움을 받아 나타나는 것을 묘유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와 남을 구분하고 차별성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경계를 발생한다. 그러나 이 경계를 늘 지니고 있지만 늘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지니고 있다가 그 연(緣)을 만날 때 발현이 된다. 반드시 다르면 경계가 된다. 왜 다른가? 본체에서 어찌 차별이 있는가? 공연히 분별 망상으로 쌓아온 것을 그 것이다 라고 분별하고 주착하면서 쌓아온 것이 생각이 된 것이다. 이 때를 일러 우리가 공부할 때라고 한다.
에고는 생각 감정 오감들이 늘 생멸을 한다. 이 에고가 일으키는 생각 감정 오감들은 어디서 근원하는가? 그것은 바로 무시 이래로 쌓아온 무명 업장과 분별성과 주착심이 작용하는 때이다. 우리가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하지 않는다고 서두에서 밝혔다. 공적영지가 삼독심에 가리어서 작용이 되는
것을 일러서 가유(假有)라 하는 것이다.
중국의 마조선사 법문에 평상심이 도라는 법문이 있다. 이 법문의 서두를 살펴보자.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生死心)으로 작위와 지향(志向)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道)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무엇이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하는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이 없는 것이다.”
평상심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생심을 일러서 평상심이라 하지 않는다. 분명히 본성이 물듦이 없어야 한다. 물듦이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있다 없다 라는 생각이 다 생사심이다. 또는 이것은 옳고 그르다 라는 분별하는 시비심을 가지고 어찌 진공묘유라고 할 수 있는가? 마음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가?


이것은 중생들은 업력으로 보고, 업력으로 듣고 업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업력 습관 분별 망상으로 굴려가면서도 그러는 줄을 모르고 하기 때문에 제대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코 묘유(妙有)가 아니라, 가유(假有)다. 공적영지가 삼독심
과 무명 업장에 물듦과 가리움 없이 우리가 사는 현상계에서 작용이 될 때에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전개되는데 정화신불이라고 부른다. 그렇지 못하여 작용할 때에는 편화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취사에서는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라고 하셨다. 불의는 도덕적 법률적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 이때 악도성품의 작용이라 하여 불의를 행한다면 이것을 어찌 마음공부라 이를 수 있겠는가? 분명히 정의는 취하고 불의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삼악도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본체 자리에서는 무선무악이라 선도 없고 악도 없는데, 이 자리에서 무슨 선과 악을 논하는 것이 무슨 공효(功效)가 있겠는가? 마음공부를통해서 내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어야지 내 마음 하나는 편하지만 사회
적 관계적 문제에서 문제 해결이 안 된다면 스승님들의 가르침과는 천만리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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