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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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특별기획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11.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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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들은 조국의 딸이니- ①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외침이 끊임없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1919년 3월 1일. 3·1운동에는 조선의 딸들이 함께 있었다.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웠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녀들은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거리로 나섰다. 일본군의 총, 검따위는 겁나지 않을 만큼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웠고, 애국심은 불타올랐다.


시대적으로 남·녀 차별이 있던 상황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독립군들의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옷을 만들며,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때로는 딸로서 그렇게 숙명처럼 독립운동가가 되어갔다.


여성으로서 그리고 천한 직업으로 업신여겨졌던 기생들도 대한독립운동에 앞장서 나갔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의 의미는 일제 강점기시절 식민지 지배를 위한 도구로 요정을 출입하는 의미로 퇴색됐다. 하지만 기생들은 검무, 승무, 시조, 가사, 소리 등 기와 교양을 두루 갖춘 종합예술인이었다. 비록 높은 신분은 아니었지만 자부심과 절개가 이어져 내려왔다.


기생이었던 앵무 염농산은 후배들에게 “기생은 돈을 섬기면 안 되고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후배들에게 항일정신과 나라사랑을 전수하며 기생의 자부심과 방향성을 제시했다.


또한 기생 김향화와 수원기생 33인은 경찰서 앞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김향화는 일본군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벌였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수감되어 모진 옥고를 겪기도 했다. 그녀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악기를 타던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그녀들이 기생이기 전에 조선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한다는 것,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병희 애국지사는 살아생전 서대문형무소 옥중생활을 증언하기도 했다.“ ‘너희같은 것은 씨를 말려야한다’고 하며 남성의 성기에는 쇠심을 박았고, 여성들은 쇠꼬챙이를 자궁에 넣어 쑤셨다”고한다. 그렇게 성한 곳 하나 없는 혹독한 고문들은 독립운동과 동시에 여자임을 강제로 포기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성과 신분의 차별을 뛰어 넘는 것은 민족의 기상이었으며, 조국을 업신여기는 사람에게서는 가엾은 조국만 남겨질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을 둘러싼 어려움을 극복하고 물신양면 뒤에서 활약상을 펼치던 여성독립운동가들, 운명처럼 독립운동가가 되어야 했던 그들에게는 그 어떤 훈장도 주어지지 않았고, 그녀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역사에 기록된 사람도 극히일부다.



다음호 계속
조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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