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위령제 범종교계 1백일기도 발원문
여기 지리산 8백리,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반야봉에서 세석평전까지,
뱀사골에서 백묵골까지,
저 계곡들 구석구석을 닦아내는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요, 그 바람이 내는 소리도 하릴없
는 바람의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활활 타오르는 단풍과도 같은 선지피로 온 산을 적셨던 억울한 원혼들이 구천을 떠
도는 것이요, 그들의 피맺힌 울부짖음의 소리입니다.
여기 지리산서 청년시절을 불살라야했던, 그 뒤엔 30여 년을 줄곧 감옥살이를 해야했던 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 시인은 ‘세석평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석평전 눈벌 삼십 리
영하 이십도의 고지에 눈꽃이 피었다.
눈썹에도 모자에도 총구에도
눈은 흰나비처럼 내려 앉아
만약에 죽음이 눈앞에 없었다면
얼마나 훌륭한 그림이 되었을까….
그렇습니다.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적대와 전쟁은,
형은 토벌대로 아우는 빨치산으로 총구를 맞서게 했습니다.
자연도 인간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서기 힘들었고, 인간은 자연 속에 젖어들 수 없는 분열
과 파괴로 내몰았습니다.
저 좌, 우 대립과 긴 시간 속에 무수한 사람들이 핏빛 꽃잎으로 졌습니다.
작은 돌무덤들로 쌓이고 흙이 되었습니다.
눈물은 비가 되고 혼은 바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연과 함께 죽어 자연으로 돌아갔으되, 자연은 여전히 그 억울한 혼들을 품었습니
다.
불의한 인간 세상이 그들을 외면했을 때, 여기 지리산의 모든 뭇 생명들이 그 외로운 혼들
곁에 남아 그들을 위로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저 역사 속의 억울한 죽음 앞에 용서를 청하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유일한 벗이 되어 온 지리산의 생명들을 또한 파괴해 왔습니다.
그래서, 짓밟히고 죽은 것이 사람인가 하면 자연이고 자연인가 하면 사람입니다.
바람소린가 하면, 죽어간 영혼들의 울부짖음이고 누군가 울부짖는가 하면 바람이 우는 소립
니다.
이제 우리는 지리산의 모든 영혼들을 위로하며, 그 영혼들과 함께 죽어간 꽃들과 나무들과
짐승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여전히 파괴당하고 있는 이 지리산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칩니다.
그 원혼들이 위로받고, 자연에 대한 파괴가 멈춰질 때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모든 생명
들의 조화와 평화가 어우러지는 사회를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1년 2월 16일 문규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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