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봉공대 삼척시 수해농심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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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봉공대 삼척시 수해농심 세워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09.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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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4일 아침 6시 서울회관에 80여명의 긴급 교구봉공대가 구성되어 삼척시로 향했다.
이번 수해는 예년 같으면 진작에 봉공대를 조직했겠지만, 수해 지역이 너무나 멀고 길도 곳곳이 복구가 되지 않아 빠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9월초 강릉 길이 열리고 교구 지구장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교구 각 단체장들과 긴급회의를 갖고 하룻만에 봉공대를 조직했다.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밤늦게 도착한다해도 5시간 넘게 봉공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은 참여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버리려 졸음섞인 눈을 부비며 회관 앞에 속속 모여들었다.
드디어 강릉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다. 곳곳이 산사태로 무너지고 수많은 집이 아직도 땅에 뭍혀 있었다. 많은 봉공인들이 기가 막힌 큰 충격에 절로 눈물을 흘렸다. 확실히 텔레비젼으로 보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나 달랐다.
5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삼척시 미로면으로 특히 피해가 컸다. 4차선 큰 도로와 철길이 끊기고 수십여 호가 될 마을이 완전히 쓸려서 쓰레기 더미로 변해 있고 높은 언덕 은행나무 꼭대기에도 홍수 때 흐르던 쓰레기가 걸려 있었다.
만약 2시간전에 마을 주민 전체가 대피하지 않았다면, 모두 희생됐을 것이라고 미로면 관계 공무원은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했다.
수재민들은 쓰레기 더미 옆 옛 집이었을 만한 자리에 부실한 텐트를 펴고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 보았다. 이날 교구 봉공대는 8백여만원 어치의 생필품을 미리 구입 삼척교당, 양양교당, 속초교당에 전달했다.
12시30분부터 5시까지 이날 봉공활동을 펼친 곳은 미로면의 수십만평은 되어 보이는 농토다. 많은 논이 흙에 뭍힌 것은 물론 대부분 물에 휩쓸려 논바닥에 일직선으로 누워있었다. 다행히 군장병은 물론 곳곳에서 봉공대가 조직되어 봉공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2면에 계속>
<1면에서>
교구봉공대도 5시간 가량 봉공활동을 계속해 5천여평 정도의 농지에 쓰러진 벼를 세웠다. 농지 주인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부어 경운기를 몰고 나왔다가 곳곳에 봉공대원들이 벼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너무나 감격하여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을 외치며, 이래서 한민족이라고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박진도교무(화곡교당)는 “벼를 세우는게 아니라 쓰러진 농심을 세우는 것 같아 너무 기쁘고 진작 오지 못한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기쁘고 즐겁게 시작한 일이었으나 평소 해보지 않은 일이라 2~3시간이 지나자 대부분 지쳐서 어쩔 줄 몰라했다. 특히 허리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5시간만에 일어서야 했던 교구 봉공대는 차마 발이 안 떨어졌지만 내일도 모래도 계속 봉공활동 할 사람들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에 미안한 마음을 감추고 일어섰다.
버스 안에서 많은 참여자들이 감상담을 발표했다. 권예주 여성회 회장은 “이렇게 조금이라도 돕게 되니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각 교당 봉공회원들은 복구활동에 더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전농교당 설중형 교도는 “사람의 손을 탄 곳만 이렇게 심하게 파손되었다”며 “자연과 어우러진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인성 사무국장은 “이번 봉공활동으로 저절로 천지은을 느끼고 동포은을 느끼며 한가족 한일터라는 것을 체험하는 훈련장이 되었다”며 “이번 역경도 슬기롭게 이겨내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박동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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