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태우고" 출판기념회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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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태우고" 출판기념회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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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1.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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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 조정제 이사장(전 해양수산부 장관)
여러 귀빈들과 법동지 여러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40여년전 제가 서울대학 문리대를 다닐 때, 당시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던 박종홍 철학박사님이 ‘현대 사상과 원불교’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신다기에 강의를 듣기 위해 처음으로 종로교당에 왔고, 그것이 저와 원불교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박사님은 21세기 문명세계에서는 “진리신앙이 아니고는 21세기 종교계를 주도할 수 없다”고 강조하시고, 원불교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원불교의 게송(偈頌)을 보고 반했습니다. 당시 성당에 다니면서 그 웅장한 성당의 천장 밑에 앉아 있자니까 내가 자꾸 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좀 커져야지’하고 불교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반야심경 공부를 해보니 ‘없다. 아니다’하는 부정과 허무주의 성향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원불교 게송의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문구에서 강한 긍정의 세계, 생생하게 펼쳐진 묘유의 세계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전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원불교의 자본주의적인 경제관에도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막스 웨버가 정립한 것으로 자본주의 정신은 합리주의와 이윤추구로 요약됩니다. 이윤의 합리화는 기독교 신교 특히 칼비니즘의 근검정신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 근검 정신은 중세의 금욕생활이 아니라, 근검해서 돈을 벌고, 이윤을 남기게 되면, 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소위 예정조화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자본주의 정신으로서 합리주의와 근검정신을 두루 잘 갖추고 있습니다. 합리주의는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에 나오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 인과법문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근검생활도 교전의 곳곳에 나타나 있고, 실제로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이 이윤추구를 극대화하면, 사회전체의 이익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자연히 보장된다고 보고 있으나, 현실은 무한대의 이익추구가 경제사회의 만병통치약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내 이익과 남의 이익을 함께 생각하는’원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행’이 그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가훈을 삼고 있습니다.
사요(四要)와 타자녀 교육(他自女敎育)을 보면, 원불교의 평등관은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사회주의적 결과의 평등이 아닙니다. 원불교는 개인의 능력 향상과 이것의 평준화에 주안을 두고, 이를 타자녀 교육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타자녀 교육은 가난한 계층의 개인능력을 향상시켜 줌으로써 소위 자본주의적 접근에 의한 사회주의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 가난 대물림 현상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데, 지식 정보 사회에서 능력과 지식의 평준화 없이는 가난의 대물림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이 타자녀 교육 캠페인을 범사회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참여 복지의 한 전형으로 발전시키자고 제안한 바 있고, 또 제가 맡고 있는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회에서 실무차원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원불교는 자본주의 정신에 자리이타를 보완토록 하고, 사회평등은 타자녀 교육으로 풀어감으로써 자본주의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을 태우고
저에게는 책이 많아서 이사할 때마다 큰 짐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책을 봐도 낡은 자료만 가득하고 쓸모없는 쓰레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한풀간 책을 태우면서 구시대의 부정적 사고, 굳어진 나쁜 습관, 그리고 지우고 싶은 업보들을 하나하나 타는 불길 속에 태워버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평생 경제학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경제학적인 접근이 체질화되어 있다시피 합니다. 경제학은 보이는 세계의 사물과 현상을 특성에 따라 나누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규명하고 상관관계를 밝히는 분별성(分別性)의 학문입니다. 이 분별성은 견성을 빨리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았으나 성불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견성은 성품을 보는 것이지, 나와 성품이 하나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우주의 본체를 파악하고 진리를 깨치기 위해서는 분별성을 놓아 버리고 일원의 체성(體性)과 자성불(自性佛)에 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나의 작은 지식과 분별성을 놓아야 하고 그 원천인 책을 태워버리려 하는 것입니다.
<중략>끝으로 다시 한번 이렇게 많이 와주신 데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의 이 정성이 우리의 주인공이신 김혜심 교무님께 큰 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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