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으로 살아온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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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으로 살아온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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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1.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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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타원 박현만 교도 " 중곡교당 부회장
저는 1946년에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습니다. 5살 때 임실교당이 창립이 되어 부모님이 입교를 하셔서 자연스럽게 원불교 교도가 되었습니다. 저의 집이 바로 임실교당 옆집이었던 것이 복 중의 한가지 복입니다. 그래서 교당 마당이 제 놀이터이고, 교당에서 자고 먹고 사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법을 몰라도 늘상 교당을 가까이 하며 살다보면 법에 젖게 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친정 어머니께서 교무님 말씀 잘 듣고 잘 받드는 교도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무님의 말씀이 절대 땅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댁식구 불공
결혼 후 부산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공무원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가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여 10개월만에 남편과 헤어져 친정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달 후에 데리러 오겠다는 남편이 일년이 지나도록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을 의심하지 않고 그 상황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없이 살았습니다. 우리 교법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의심에 걸리지 않고 잘 살 수 있었고, 그래서 오늘의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고 오랜 세월 후에 깨달았습니다.
6남매 장녀인데 결혼 후 28살에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이 시댁 큰 형님과 사업을 같이 하며 더부살이를 하는 상황에서 17년 동안 다섯 동생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 상황을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각각의 종교를 가진 시댁 식구들과 잘 지낼 수 있었는데 크고 작은 경계가 있을 때마다 불공을 드리고 원불교를 신앙하며 이 법을 실행해서 그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종교가 없으셔서 원불교도로 만들려고 평소 불공을 드렸습니다.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늘 정성을 들여서 입교를 하셨습니다. 임실교당에 화재가 나서 어머니 이름으로 적은 금액이지만 희사를 했다고 말씀드리니 교당에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기독교인 시누이가 기독교 의식으로 하려고 했는데 가족회의를 해서 원불교 의식으로 천도를 해드렸습니다. 어머니에게 이 법으로 효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결혼을 하고 다섯 동생을 데리고 살면서 남편에게 불공을 잘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 남편은 성격이 굉장히 급해서 화를 잘 냅니다. 그래도 남편 불공을 잘 하고 이 신앙을 바탕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36년 동안 대들지 않고 소리없이 살아왔습니다. 남편 교화를 시키기 위해 늘 기도를 했더니 교도가 되었고, 중곡교당 회장직을 맡았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아 행사 때마다 제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지방 교당 봉불식에서 희사를 한 교도님이 너무 부러워서 나도 교당을 창립하고 싶었습니다. 신앙심이 생기기 전이었고, 큰댁과 함께 사업을 같이 하던 때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마 큰 벼락을 내릴 것이지만 말이라도 해보자. 내 생에 교당을 하나 세우고 싶다고 간절하게 이야기를 했더니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남편불공
남편이 10년 만에 큰댁에서 독립을 해서 안산에 있는 스칠로플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빚이 많은 회사라 직원들의 마음이 공중에 떠 있고, 애사심이 없었습니다. 정성을 다하자하고 남편은 현장에서 저는 음식공양으로 직원들 불공을 열심히 해서 성장하여 안정이 되어가는 중에 큰 불이 났습니다. 화재가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서 삼세의 큰 업장이 하나 소멸되겠구나, 달게 받자 하는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담담해졌습니다. 엄청난 화재가 났지만 오히려 직원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웃 공장에서 잘못하여 화재가 나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밉지가 않았습니다. 이웃공장에서는 30여명이 사상을 입었는데 저희는 인명 피해 없이 경제적인 피해만 입었습니다. 업장을 받는데도 탈없이 지나가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렸습니다.
3년 전 제가 큰 수술을 했습니다. 큰딸이 결혼날짜를 받아 놓고 있었고, 일주일 후에는 서울원음합창단 연주회가, 또 모스크바 교당에 공연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발병하였습니다. 사은이시여, ‘이 세가지 일을 다 마친 다음에 치료를 받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다녀와서 짐을 푸는데 거짓말처럼 열이 났어요. 다음날 병원에 갔더니 급했던지 다른 환자를 밀치고 먼저 수술을 해주셨어요. 수술할 때 아직은 갈 때가 아니고 일을 다 하고 가야겠다고 사은님께 기도했습니다. 아침 8시부터 오후4시까지 수술을 했답니다. 사은님 사은님 법신불 사은님 하면서 깨어나더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이 사람아 30여년을 먹여 살렸는데 나를 안 찾느냐고 야단을 해서 당신이 법신불 사은님이시오 하니 그렇기는 하네 했습니다.

일원가족
제가 이 공부를 하면서 항상 교전을 많이 읽고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늘 따라다니면서 불공을 하고 비위를 맞췄더니 저의 남편이 신심이 많이 생겼어요. 중곡교당 건물이 너무 작아서 교도들이 생활하기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준비도 없이 교도님께 내년 봄에 교당을 다시 지으렵니다. 교도님들은 편안하게 계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하여 신축을 했습니다. 교도님들도 희사하시고 해서 봉불식을 했습니다. 교무님들께서 제2창립주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새로운 교당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제2창립주라도 하고나니 약간 안심을 하고 삽니다. 남편이 생활이 어렵고 신심도 없었던 상황에서 저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습니다.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합니다. 법신불 사은시여! 저의 3남매가 일원가족이 되어서 교단에 봉사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아이들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3남매가 모두 일원가족이 되었고 사위와 며느리도 교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키운 다섯동생들도 공부도 생활도 하면서 대종사님의 제자로서 사는 것을 보면 제가 대종사님 법을 만난 복이라 생각합니다. 막내동생 박영훈이 합천원경고등학교 교감이구요, 둘째동생은 우리은행 비서실장인 박영호, 여동생은 정토회원이면서 원불교 에스페란토회 회장입니다. 형제들과 상생선연으로 만나 이 법으로 재미있게 사는 것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장원희 여성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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