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 - 따뜻한 시선 가진 소탈한 영화평론가... 박선국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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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 따뜻한 시선 가진 소탈한 영화평론가... 박선국 교도
  • 한울안신문
  • 승인 2005.07.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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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진리 찾아요"



‘영화평론가’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영화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는 애연가, 혹은 프랑스 영화잡지를 읽는 검은 베레모? 어쨌든 다소 무겁고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박선국교도(호적명 희세, 돈암교당)를 만나면 그런 생각이 편견인 것을 알게 된다. 언제나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와 차분한 목소리, 흰색 생활한복의 그는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을 가진 소탈한 영화평론가다.

# 파리교당의 산증인
1991년 파리의 어느 조그만 하숙방, 네 명의 한국인이 모여 앉는다. 김신원교무의 죽비소리로 시작한 파리에서의 첫 원불교 법회. 한국을 떠나온지 1년여만이었다. 이제는 세계교화의 또하나의 디딤돌이 된 파리교당의 초라한 첫걸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낯선 땅에서 오랜만에 보는 법회라 어색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막상 법회를 시작하니 일원상서원문이 술술 나왔다. 처음으로 만리 타국땅에서의 삶이 외롭지 않았다. 법회를 보는 곳이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교도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하숙방을 전전하던 파리의 이방인들에게는 번듯한 교당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 깊어갔다. “교당 터를 잡기 위해 교무님과 함께 파리 전체를 누비고 다녔죠. 내 집이라도 그렇게까지 못할텐데,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더라구요.”
외로움과 그리움에 밤을 지새곤 했던 타향의 법동지들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우리집’을 갖고 싶었다. 얼마전 파리교당 봉불식 소식을 들은 박교도는 한동안 밥을 먹지 않고도 배가 불렀다.

# ‘영화평론가’라는 이름
1990년부터 12년동안 파리에서 유학했던 박교도는 파리의 극장가 ‘시네마떼끄’에서 며칠밤낮이나 영화를 봤던 때를 추억한다. 그 시절, 한화로 몇만원정도하는 ‘한달 정액권’을 끊으면 차라리 잠도 극장에서 잤다.
그가 즐겨봤던 영화는 「시인의 피」(1930),「미녀와 야수」(1946)로 유명한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감독의 작품.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룬 초현실주의 작품들이에요. 삶과 죽음, 이 세계와 저 세계에 대한 내용중에 법문과 닿는 부분들이 많아요.”
2001년, 이도전교무의 권유로 ‘월간 원광’에 영화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다음해 결혼한 부인 강해인교도의 큰 형부였던 이도전교무가 당시 월간 원광의 편집장이었던 것.
“평론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면 영화를 볼 때 상(相)이 생겨요.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보면 영화에 온전히 빠질 수가 없죠. 그게 큰 경계였어요.”

# “과연 나는 누구일까?”
작년 11월, ‘과연 나는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한동안 방황을 하며 가족들을 걱정케 했다. 故 유산 유허일 선진의 막내딸인 어머니 (유경렬 교도)를 따라 평생을 신앙했던 원불교에 매달렸다. 그 때 잡은 것이 마음공부.
“아직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완전히 찾지는 못했어요. 다만 지금 달라진 건 두렵지 않다는 거죠. 만약 제가 답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날까지 평화롭게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들을 법과 연결시켜보고 싶다는 박선국교도. 일원가족안의 신앙인이자 영화평론가인 그의 앞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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