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도 더디게 흘러가는 계동길 , - 서울교화의 모태 성성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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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도 더디게 흘러가는 계동길 , - 서울교화의 모태 성성원의 집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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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 서울 교화의 성적을 따라서 2




소태산 대종사 서울교화 성적지를 찾아 나서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북촌 일원이다. 이곳 북촌 일원은 소태산 대종사와 함께 서울교화를 개척했던 이공주, 이동진화, 민자연화, 이성각, 황정신행, 박창기, 김영신, 성성원, 박공명선, 박영주 등 많은 제자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바로 인근에 조선왕조의 5대 궁궐로 꼽히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이 위치해 있어 예로부터 많은 권문세가들이 살던 부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계천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탓에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가회동, 재동, 계동, 원서동, 안국동, 송현동, 사간동, 소격동, 화동, 팔판동, 삼청동 등 11개의 법정동이 자리하고 있다. 1977년 이 일대가 한옥보존지구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면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직까지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런대로 당시 모습들을 어림잡아 볼 수 있는 곳이다.



# 서울 교화 인연들이 모여 살던 곳


그 중에서도 계동은 초기 제자인 성성원, 이공주 등의 집이 있던 곳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서울의 주요 성적지 중 하나다. 지난주 한울안신문에서도 주지했다시피 소태산 대종사 첫 서울 상경시 당주동 임시출장소를 개설하기 전 박사시화의 주선으로 이틀간 머무른 곳은 그의 쌍동이 여동생 박공명선의 외동딸 성성원이 살고 있는 계동 집이었다. 박공명선은 부군과 일찍 사별한 뒤 외동딸인 성성원과 함께 계동에 살다가 성성원이 경성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전북 임실 사람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진대익(본명 진주현)과 결혼을 시켜 가까이 살도록 했는데,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에 올라오자 딸과 사위의 양해를 얻어 그들의 신혼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덕분에 소태산 대종사는 당주동 임시출장소가 마련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서울지역 최초 제자인 박사시화와 박공명선을 입교시켜 서울교화의 든든한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원불교 경성교화’를 집필하며 소태산 대종사 서울교화 성적지들을 직접 조사한 서문성 교무는 구 토지대장을 확인한 결과 당시 진대익·성성원의 집이 있던 곳은 계동 46번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계동 46번지’는 개정된 새주소로 볼 때 계동길 96-1번지로 그런대로 말끔하게 생긴 한옥 한 채가 자리를 잡고 들어서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한옥은 소태산 대종사가 유숙할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이라기보다는 훗날 개축을 하거나 다시 신축을 한 건물로 추정이 된다. 진대익·성성원은 원기 15년(1930) 계동 100-8번지로 이사를 하기 전까지 이곳에 거주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소태산 대종사가 첫 서울행가시 유숙을 한 이후 또다시 이곳에 들렀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게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불과 몇 십 미터 거리에 있는 이공주의 집에 소태산 대종사가 자주 들린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 경성지부 재가교무였던


성성원


여하튼 소태산 대종사 첫 서울 행가시 소태산 대종사를 자신의 집에 유숙케 했던 성성원이 원불교에 귀의를 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더 시간이 지난 후였던 것으로 파악이 된다. 어머니인 박공명선과 이모님인 박사시화는 소태산 대종사 첫 서울 상경 시 친견한 자리에서 입교를 했으나 당시 20살에 불과한 나이로 신혼생활을 시작한 성성원은 아직 종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터라 입교를 하지 않고 있다가, 원기 10년(1925) 8월 최도화를 연원으로 입교를 했으며 원기 11년(1926) 초 계동 이공주 집을 찾은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직접 성원(聖願)이란 법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성원의 남편 진대익 또한 한참 뒤인 원기 30년(1945)에야 정식 입교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진대익은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을 좋아해 일찍부터 아내 성성원의 교화사업을 적극 후원하는 한편, 의사로서 바쁜 시간 속에서도 틈틈이 중앙총부 정기훈련에 참석할 정도로 신심이 독실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 소태산 대종사는 성성원을 원기 22년부터 5년 간 경성지부 재가교무로 임명해 서울교화에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크게 중용을 했다. 당시 성성원은 전무출신의 길을 걸어갈 것을 염원했으나 소태산 대종사는 “불법이 생활이요 생활이 불법이다. 가정이 있고 난 뒤에야 사회와 국가가 있다. 재가 출가가 서로 일심 합력해야만 우리 회상이 크게 발전한다”며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가와 출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 법문은 성성원에게 내린 또다른 법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번은 성성원이 “저도 전무출신들과 같이 깨끗이 재계하옵고 기도를 올리고 싶사오나 가정에 매이어 자유가 없는 몸이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오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여쭈니 “마음 재계하는 것은 출가·재가가 다를 것이 없다. 그대의 마음만 깨끗이 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려라. 그러하면 그 정성에 따라 그만한 위력을 얻는 것에는 아무 차별이 없다”는 법문을 내려 기도의 위력을 얻는 공력에는 출가 재가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보면 현대사옥 약간 못 미쳐 좌측으로 꺾어져 들어가는 길이 바로 계동길이다. 이곳에서부터 한 200여미터 남짓 직진해 들어가면 여기가 정말 서울 한복판인지 싶을 정도로 세월이 그 흐름을 멈춘 다소 시골스런 풍경들과 직면하게 된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목욕탕과 낡을 대로 낡은 한옥을 개조한 황금알식당을 지나면 곧바로 오른편으로 막다른 골목이 나오는데 그 끝집이 바로 진대익·성성원의 집이다. 조금은 폐쇄적으로 보이는 대문으로 인해 내부를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조금 고지대로 올라가 살펴보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 있는 ㄷ자 혹은 ㅁ자 형태의 허름한 한옥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한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부터였다고 하니 소태산 대종사가 머물렀던 성성원의 집도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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