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로서 강자가 되는 법문' 내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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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로서 강자가 되는 법문' 내린 곳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9.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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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 서울 교화의 성적을 따라서 3 , - 계동연구회라 불리던 이공주의 집



원불교 서울교화 개척사를 살펴보는데 있어 계동은 성성원의 집 외에도 소태산 대종사의 성적이 그 어느 곳보다 많이 어려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성성원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계동 이공주의 집은 창신동 경성출장소가 설립되기 이전까지 경성출장소의 역할을 대신했던 매우 중요한 성적지 중 하나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 초기 명칭이었던 ‘불법연구회’에서 그 이름을 따 이공주의 집을 ‘계동연구회’라 칭하며 서울을 내왕할 때마다 자주 이곳을 찾았다. 서울지역 교도들도 창신동 경성출장소가 생기기 이전까지 이곳 계동 이공주 가를 모임 장소로 하여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할 때마다 모여들어 법문을 받들곤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 이공주 가에서 ‘약자로서 강자가 되는 법문’ 등 수많은 법문을 설하며 새 회상 창립 인연들을 한 사람씩 결속해 나갔다.


소태산 대종사와 이공주 종사가 처음 만난 것은 소태산 대종사의 2번째 서울 상경이 이뤄진 원기 9(1924)년 늦가을 무렵이었을 것으로 확인된다. ‘원불교 경성교화사’를 쓴 서문성 교무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공주 종사의 입교일로 비추어 볼 때 원기 9(1924)년 11월 중순 경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익산 불법연구회 본관 건설공사가 어느정도 마무리 될 무렵 ‘경성에서 꼭 만날 사람이 있다’며 갑작스럽게 상경한 소태산 대종사가 찾아든 곳은 바로 창신동 산골짜기 비탈에 있던 이동진화의 수양채를 찾아든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며칠 동안을 머무르며 박공명선의 소개로 찾아 온 이공주 종사를 비롯한 그의 어머니 민자연화와 언니인 이성각, 그리고 조카인 김영신 등 새 회상 건설에 큰 역할을 담당할 창립인연들을 만났다.


훗날 이공주 종사는 창신동 이동진화의 집에서 소태산 대종사와 처음 만났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소태산 대종사님을 뵙고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 앉으니 ‘귀한 사람들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내가 알고 있는 분야는 대답해 드릴 수 있지만 엉뚱한 일을 묻는다면 대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염주를 깎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것이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 민자연화는 삼세(三世)를 알고 싶다고 했고 언니 이성각은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그 모두를 알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욕심이 너무 많다고 웃으시며 앞으로 그 모두를 가르쳐 주겠노라 하시며 부모 형제가 기약없이 헤어졌다 뜻밖에 만난 것처럼 기쁘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두 번째 서울 상경에서 이공주 종사 일가와 이렇게 인연을 맺은 후로 서울에 올라 올 일이 있을 때마다 계동 이공주 종사의 집 사랑채에 머무르며 서울지역에 거주하는 제자들과 자주 회합을 갖곤 했다. 특히 원기 11(1926)년과 원기 12(1927)년 두 해의 기록을 살펴보면 소태산 대종사가 이공주 종사의 집에서 새해를 맞이한 기록이 보일 정도로 출입은 빈번했다. 이공주가 문학박사가 되어 조선여성을 계몽하고 싶다고 꿈을 이야기 했을 때, 그 보다는 도덕박사가 되어 전 세계 인류를 구하라고 한 법설(원기 11(1926)년) 이나, ‘약자로서 강자가 되는 법’을 내용으로 한 강자약자진화상의 법문(원기 13(1928)년)은 바로 이곳 계동 이공주의 집에서 하신 법문들이다.


계동 이공주의 집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이런 일화도 하나 전해진다. 원기 11(1926)년 8월 여름장마가 한참일 때 소태산 대종사가 마침 이곳 이공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허름한 뒷 담장이 무너질 위험에 처하게 됐는데, 마침 그 담장 아래쪽에 장독대에 이공주 종사가 장독을 잡은 채로 서 있었다. 이것을 본 소태산 대종사가 급히 이공주 종사에게 어서 나오라고 소리를 치니, 이공주 종사가 깜짝 놀라 달려 나옴과 동시에 담장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어찌보면 형세를 보아 미래를 예측해 나가는 소태산 대종사의 혜안일 수도 있고 또 어찌보면 소태산 대종사의 신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 한토막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가 이곳 계동 이공주 가에서 남겨주신 법문과 일화들이 어디 이것 뿐일까?


진대익·성성원의 집에서 20여 미터 정도를 올라가다 좌측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면 이공주 종사의 집이 있다. 구토지대장으로 보면 계동 15-3번지로 새 주소로 볼 때는 계동길 103-15번지에 해당한다. 현재 남아있는 집은 소태산 대종사의 성적이 어려 있는 건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 뒤에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한옥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인근 지역과는 달리 주변에 붉은 벽돌로 지은 연립들이 들어서 있는 탓에 옛 모습을 짐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하튼 이공주 종사의 집을 중심으로 한 이곳 계동 일대는 원불교 서울교화사를 써 내려가는데 있어서 좀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 필요한 지역이다.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인근에 있는 계산에 민자연화 오빠 소유의 별장이 있어 소태산 대종사가 이공주 종사의 집에 들릴 때마다 자주 이용을 했다는 기록이 엿보이나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길이 없다. 이공주 종사의 집터를 한바퀴 돌아 본 뒤 밖으로 나오니 바로 인근에 고려대와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의 옛집이 있고, 또 그 인근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빌간했다는 한옥게스트하우스 ‘만해당’도 보인다. 이들 모두가 같은 시대를 살던 걸출한 인물(소태산 대종사 1891~1943, 김성수 1891~


1955, 한용운 1879~1944)들이니 혹여 이곳 계동에서 한번쯤은 스쳐가지는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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