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갈 건 적공積功 보따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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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갈 건 적공積功 보따리 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06.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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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타원 김혜성 원정사 열반



김혜성 원정사(圓正師)가 6월 5일(수) 오전 11시에 노환으로 열반했다. 세수 90세, 법랍 50년. 고인은 1924년 전남 목포에서 고(故) 김신석의 1남1녀 중 외딸로 태어났다.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3학년이던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국산 홍인천(진기) 명예 대호법(전 중앙일보, 동양방송 회장)과 결혼했다. 슬하에 홍도전(라희, 삼성미술관 리움관장), 홍석원(석현, 중앙일보 JTBC 회장), 홍석은(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도관(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 홍도균(석규, ㈜보광 회장), 홍도현(라영,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 등 4남2녀를 두었다.


김혜성 원정사는 4·19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 명예 대호법이 경찰 발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3년여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여러 어려움을 신앙과 수행의 힘으로 견뎠다. 원기 48년 송예성 종사의 인도로 종로교당에서 입교한 후 평생 한결같은 신심을 지켰다. 홍인천 명예 대호법의 평전 「이 사람아, 공부해」에는 고인이 “내가 죽을 때 가져갈 것은 ‘적공(積功) 보따리’밖에 없다”는 말을 늘 되풀이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랜 병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교법의 핵심이 담긴 ‘일원상 서원문’을 병상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50차례 이상 독송한 결과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일원상 서원문’ 독송을 평생 실천했다.


송영봉 원로교무는 그런 고인에 대해 “순경(順境)에서나 역경에서나 늘 기도 일념으로 사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특히 “원기 71년(1986년) 국산 홍인천 명예 대호법이 돌아가신 직후 성북동 자택을 찾았을 때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의연하신 모습을 보고 수행의 경지가 보통이 아님을 느꼈다”고 돌이켰다. 원정사의 신심은 주변을 감화시켰다. 수감 시절 부군이 입교했고, 여섯 자녀도 차례로 원불교 교도가 됐다.


원기 62년 믿을 신 ‘신타원(信陀圓)’이란 법호를 받고 원기 73년 ‘대호법(大護法)’의 법훈을 수훈했으며, 원기 76년 ‘정식출가위’에 승급하여, 종법사의 자문역할인 원로회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부군과 함께 서울대학교 법대 후배들을 위해 홍인천 명예 대호법과 자신의 법명을 딴 ‘인혜장학회’를 설립했으며, 원기 73년 국산과 신타원의 법호를 딴 ‘국신장학회’를 설립해 교단의 예비교역자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서울보은회 창립에 기여했다.


미주 교화 등 원불교 교세 확장에 고인이 끼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오랜 서원을 세워 자녀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도록 한 결과 원기 96년 미국 뉴욕주 클래버랙에 ‘원다르마센터’가 문을 열어 결복교운의 터전을 굳건히 했다.


원정사의 천도재는 매주 화요일 서울회관 5층 대각전에서 올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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