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의 관문, 동대문 전차정류장

동대문 전차정류장은 소태산 대종사가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을 내왕할 때 이용한 관문이다. 상경하여 창신동회관에 갈 때면 경성역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비탈진 언덕인 창신길을 따라 창신동회관을 오르내리셨다. 익산총부로 귀관할 때도 동대문 전차정류장에서 경성역에 가곤 했다.

2025-03-22     한울안신문

원기11년(1926) 음력 7월에 창신동회관이 설립되고 원기18년(1933)년 7월 5일 매매(구 토지대장 참고)되므로 만7년 간 동대문 전차정류장을 통해 창신동회관을 내왕했다. 그리고 경성 일대를 이 전차정류장을 거쳐 탐방하셨을 것이다.
동대문 정류장 위치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를 살펴보면 지금의 동대문역 9번 출구 앞 횡단보도 일대로 추정된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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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전차정류장 일대에 전차차고지(동대문 지하도 8번 출구 부근)가 있었고, 최초의 화력발전소와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이 있었다. 또한 동대문 차고지를 종점으로, 주요 노선은 동대문-청량리 노선, 동대문-종로-서대문-영천 노선, 동대문-남대문-원효로-노량진 노선 등이 있었다(<한국근대사의 풍경>).
<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에 등장하는 전차 관련 기록이다.
“무더운 삼복 여름날이었다. 종사주께서 어디 가자하신다. 종사주와 나는 시원스럽게 하얀 모시옷 차림을 하고 종로 쪽으로 가기 위해 창신동에서 내려와 동대문 전차길로 나섰다. 이때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막 전차가 출발하려 하고 있기에 우리는 얼른 탔다. 타고 보니 왕십리행이었다 남대문행을 타야 하는데 급한 김에 모르고 탔는데도 종사주께서는 전혀 당황한바 없이 태연하셨다.”
동대문~왕십리, 동대문~종로~남대문 방향 노선을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계동 이모집(이공주의 집)에서 다니고, 길선씨는 창신동회관에서 다녔는데 장안 지리를 모르므로 송도성 교무가 동대문 밖에서 광화문까지 전차를 타고 데려다 주곤 하였다.”
창신동회관에서 도렴동 소재 경성부기학원을 가는 동대문~광화문 간 전차 노선을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김영신과 박길선은 원기12년(1927) 3월 말부터 9월 20일까지 경성부기학원에 다닌다. 창신동회관 초대교무 송도성은 원기11년(1926) 7월부터 원기12년 5월까지 근무한다. 이로보아 송도성 교무가 박길선과 대동했을 때는 원기12년(1927) 3월 말~ 4월 초로 추정된다.
“종사주께서 익산 본관으로 귀관하실 때… 주로 할머니(민자연화)가 나가셨지만 어떤 때는 나이로는 수상인 어머니(이성각)가 배웅을 나가시었다. 차비는 이모(이공주)가 대었는데, 어머니가 기차료를 3원 80전에 끊고 거스름돈 20전과 차표를 드리면「그건 성각이 해라」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창신동회관에서 경성역까지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배웅한 분은 민자연화와 이성각이며 동대문에서 경성역전까지 전차를 이용도 했던 것이다.
“경성에는 전차가 있어 교통수단에 편리하여 3전만 주면은 어지간한 곳에는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팔산님은 도무지 전차라곤 타는 법이 없었고 노상 걸어 다녔다.”
팔산 김광선은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 4대 교무로 원기14년(1929) 11월에 발령받아 원기15년 총회까지 짧은 기간 근무한다. 이때 동대문 전차정류장에서 전차를 타지 않고 도보로 다녔던 것이다. 

공동연구자 방길튼·박혜현·윤지승

3월 21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