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과 창신길
창신동회관은 영광(영산)지부, 익산본관에 이어 세 번째로 마련된 교화장소로, 서울 경성에 새 회상의 교화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실질적으로 최초의 지방 교화지이다. 이 창신동 골짜기의 창신길은 제생의세를 위하여 교화의 행보를 디디신 소태산 대종사의 땀방울이 맺혀 있는 교화의 길이다. 소태산은 경성역전에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 정류장에 내렸고, 가파른 창신동 골짜기를 따라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에 도착했던 것이다. 창신길은 소태산 대종사가 밟으신 서울교화의 길이다.
창신길은 입구의 궁골(궁동, 창신동 651번지 일대, 순조 19년 왕세자빈으로 간택된 조대비의 친정 별장이 있던 곳)을 거처 큰 우물이 있는 대정동(창신동 649번지 일대, 일명 창신궁, 현재 새마을금고)을 거친다. 정산종사는 경성출장소 2대 교무시절(1927년)에 “서울 창신동에 사는 박종상이라는 사람은 조상의 사당에 지게를 구해 놓았다 하나니, 그는 본래 시조가 소금장사를 하여 모은 재산으로 성공하였기에 그 자손이 시조의 근본을 불망하는 의미라 하노라.”(『정산종사법설』 제2편 ‘안위불망安危不忘 추원보본追遠報本’)라는 예화의 경험지다. 박종상은 고리대금업자 임종상인 듯하며, 그의 거주지 중 한 곳이다(출처: 『경성부관내지적목록』 1927년, 서울도서관 발행).
대정동을 지나 창신동회관을 못 미쳐 동편에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감싸고 있는 홍숫골이 있고 암벽에 홍수동(紅樹洞)이라고 새겨 있었다. 창신동회관 언덕에서 앵두를 따서 예회 때 점심공양 후 나누어 먹었던 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홍숫골(홍수동)과 이어진 인숫골(인수동)이 있는데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창신동 : 공간과 일상, 2011 서울역사박물관 발행)
그리고 창신동회관 동편 위쪽에 채석장 절개지가 있다. 일제는 1910년에서 1920년대 후반까지 조선은행, 경성역, 경성부청(서울시청), 조선총독부에 이르는 건물을 짓기 위해 이곳에서 채석해 갔다. 아마도 낙산에서 채석하는 진동을 창신동회관에서 느꼈을 것이다.
소태산은 원기15(1930)년 8월에 노진허·김영신을 데리고 낙산 채석장 노동자였을 청나라 석공(淸人石工)을 채용해 며칠간 창신동회관의 바위에 구멍을 뚫고 이어서 목수를 들여 판자울타리를 설치한다.
경성출장소는 이동진화가 원기9년(1924) 10월(음 8월)경에 낙산 성문 밖 창신동 605번지를 수양채로 마련한 대지 116평과 목조 초가 5칸 1동, 4칸 1동을 원기11년(1926) 음력 7월에 희사 받아 창설한 도량이다.
이곳에서 10일마다 매 6일에 예회를 열어 10여 명이 모였는데 방이 비좁아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여 창신동회관에 오면 “노인네들은 이리로 오시고 젊은이는 저리로 가 앉으시오.”하며 자리 정돈을 하고서 법문을 하는데 회원들은 평범하게 하는 말씀이었으나 어찌나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는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이동진화, 이공주, 민자연화, 이성각, 박공명선, 성성원, 이정원, 심오운, 김낙원, 이현공, 이철옥 등이 유지비를 담당하기로 하고, 이동진화의 침모인 김삼매화가 식당 등 살림살이를 돌보기로 한다(송규, 《불법연구회창건사》 제23장).
창신동 골짜기와 계곡 주위는 큰 바위와 소나무가 많으며 풍광이 좋아 수양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며, 집들이 골짜기 따라 산재해 있었고, 창신동회관 옆에 계곡(복자천)이 흘렸고 빨래터가 있었다. 이 계곡물은 청계천으로 합쳐진다.
동대문 전차정류장에서 창신동회관까지 900m 정도의 비탈길을 20여 분 걸어 도착하는 길이다. 창신길에 들어서서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면 창신동 계곡 중간쯤에 다다르고, 이 계곡을 따라 가파른 비탈길을 더 오르면 ‘옛 지장암’과 그 위쪽에 빨래터가 될 만한 계곡 웅덩이에 이르고 얼마 더 오르면 창신동회관에 도착한다. 그리고 창신동 회관 옆에는 ‘형제우물’(MID그린아파트 뒤편)이 있었다. 지금의 지장암은 아래 계곡에서 이전하였으며 목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이 모셔있다. 소태산은 이 창신길을 걸어 오르내리셨다.
공동연구자 방길튼·박혜현·윤지승
4월 25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