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 삼학 1

2025-11-26     한울안신문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독자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글에서 영향을 받고 또 피드백을 주는 독자를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지난주, 강남교당에서 강남지구합동 법회 행사가 있었다.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 뒤, 역삼교당 도반님들과 점심공양을 하면서 원불교 이야기꽃을 피웠다. 특히 대화가 끝날 무렵, 옆자리에 앉았던 광명교당 교도께서 다가와 필자의 컬럼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 하시고 감동을 받았다고 악수를 청하였다. 필자는 그 교도께 이러한 관심이 곧 원불교 마음이라고 감사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것이 도반 사이의 운수의 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지난주 컬럼까지 내용을 정리해 본다. 
일원은 마음을 가만히 하면 만나는 진리 자리이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아니 나를 있게 한 모든 우주 사물과도 같은 본성이다. 이러한 실증적 경험(선불교에서는 실감이라도 부르는)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일원상 서원문의 후반부이고 오늘 컬럼의 주제이다. 삼학이라고 부르는 세 가지 실천 항목인데,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첫째 항목인 심신 수호는 마음과 몸을 잘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이다. 그냥 심신 수호가 아니고 법신불 일원상을 체 받아서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선불교의 소의 경전이라는 금강경의 첫 페이지,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선호념, 선부촉하신다’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즉, 우리가 몸과 마음을 잘 지키고 보호해야 하겠지만, 일원을 체받으면 마땅히 받는 은혜라는 느낌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선호념(善護念)은 산스크리트 원전에는 paritrāṇa, 즉 최상의 은혜를 베풀고 보호한다는 뜻이고, 선부촉은 parindana로서 사랑, 은총, 자비를 베푼다는 뜻이다. 필자에게 간화선을 가르쳐 준 송광사 스님은 선호념을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해석하셨다. 마치 찰랑이는 물을 담은 그릇을 다루듯 우리 마음을 조심조심 쏟아지지 않게 조심해서 보호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선을 배우러 올 때에도 현대인들은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무슨 일을 하듯이’ 뚝딱하고  떠난다는 것이다. 선은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 작용을 관찰해서 나의 몸에 뿌리 박은 나쁜 습관(카르마)을 녹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참다운 마음의 수호는 바로 마음을 조심 조심 소중히 다루는 것임을 시사한다.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음식을 먹는다. 마치 몸이 음식을 버리는 쓰레기통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몸이 고장나서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몸을 학대한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을 보아도 그저 몸을 근육을 늘이는 도구로 착각하게 된다. 요즘 TV 광고도 몸에 좋은 약광고가 극성이고 피부 미용 광고가 극성이다. 그러나, 도구로서 전락한 몸과 마음은 지치고 병들기 십상이다. 오직하면 편안한 잠들기 조차 힘들게 되었을까 싶다. 원만한 심신을 수호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럴 때, 소태산대종사님의 일성이 기억난다. 몸 마음 수양법을 묻는 제자들에게 ‘뿌리를 얻은 것과 같고, 목수가 씨줄 날줄로 베를 짜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곧 삶의 뿌리를 굳건히 하고 중심을 잡는 요체라는 가르침이며, 바로 ‘선’의 요체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이다.
‘선과 성서’라는 일본인 카톨릭 신부가 쓴 책을 본 일이 있다. 선의 수행을 통해서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는 경험을 쓴 책이다. 진리는 성서 읽기나 기도로서만은 이해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 진리의 가장자리에서 빙빙 돌 뿐이다. 머리로서는 몸에 베어 있는 오래된 습관을 떼어내지 못한다. 대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언어를 끊고 입정’하는 것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부터 이해하였다고 실토한다. 일원상 서원문의 일원이라는 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바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삼학의 첫 프로세스와 상통함을 알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몸과 마음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세 가지 공부를 지성으로 하는 삼학의 위대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공부 방법이야 말고 양자 AI시대에 가장 보편타당한 삶의 씨줄 날줄임을 알 수 있다.

11월 28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