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과 계산의 계동 별장

계동桂洞은 원서동(창덕궁 옆)과 가회동 사이로, 현대계동사옥에서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계동길의 양편이다. 계동길 초입의 현대계동사옥 자리는 과거 제생원濟生院 터였고 조선 말엽에 계동궁이 있었다. 계동은 제생원에서 유래한 ‘제생동’이 변음된 지명이다.

2025-12-24     한울안신문

계산桂山은 계동길 오른편의 산언덕으로, 계동궁 터에서 계동길을 따라 420m정도 올라 오른편으로 들면 대동세무고등학교(옛 대동大東상업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학교 운동장 일대인 계산 언덕에 연암 박지원의 구택과 손자 박규수의 정자가 있었다.
이 산언덕이 있는 계동에 이공주 모친인 민자연화의 오빠 별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성각(민자연화의 맏딸)과 김영신(이성각의 딸) 모녀가 얼마동안 이곳에 거주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교화 초기에 상경하면 계동 이공주家에 머물렀고 한때 이 계동 별장에도 머물렀다.

김영신의 회고이다.
“외할머니[민자연화]의 오빠 되는 분이 계동에 별장이 하나 있어 우리는 거기에서 얼마동안 살았다. 종사님[소태산 대종사]께서 상경하시면 그곳 안채에 모셨으므로 장안에 사는 회원들이 다 모여들었다. 동진화씨는 옥색 스란치마[치장한 치맛단을 덧댄 긴 예장용 치마]를 맵시 있게 차리고 와 곱게 절하였고, 삼매화씨도 정성을 다해 큰절하였으며 이모[이공주]는 회사식 가마머리 모양[전통 가르마를 변형한 서양식 머리스타일]에다 양장차림으로 종사님께 큰절 올렸다. 나는 종사님 뒤에서 부채질을 해 드렸다. 이렇게 귀부인들이 번번이 출입하고 큰절하는 모습을 별장 뒤 산언덕에서 일경日警이 정탐하고 있는 줄은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경성 회원들은 민자연화 오빠의 계동 별장 안채에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었다. 이때 큰절을 올리고 부채질해 드리는 모습을 별장 뒤 산언덕에서 일경이 정탐하고 있었다. 산언덕은 『대경성부대관』의 계산보성교 일대로 여겨진다.
계동 별장에서 모임을 갖은 시기는 원기11년(1926) 음력 7월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이 설립되기 전인 원기10년(1925) 여름철 무더운 때로 추정된다. 부채질할 정도의 더위에 좀 더 넓고 트인 시원한 장소에서 회집한 듯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종사님 행방이 묘연하였다. 아무 말씀도 없이 이리 본관[익산본관]으로 귀관하신 것이었다. 이날 내가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려고 나서는데 일본인 형사가 찾아와 집안 수색을 하였다. 「어제 그 사람 누구야?」 「우리 삼촌이세요」 나는 유창하게 일본말로 대답했다. 이렇게 우리는 누가 물으면 나는 종사님을 삼촌이라 하였고, 어머니[이성각]는 동생이라 하였고, 이모[이공주]는 오빠라 하였고, 할머니[민자연화]는 조카라 하였다. 20살이던 3월에 나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4년제를 졸업하였다.”(앞의 책)
경성교화 초기에는 여자 회원들만 있었기에 의심받지 않기 위해 소태산 대종사를 나이에 따라 조카, 동생, 오빠, 삼촌이라 불렀던 것이다. 
김영신은 계동 옆 재동에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20살(1927년)이던 3월에 4년제를 졸업한다. 이로보아 이성각-김영신 모녀는 1925~1926년에는 계동의 별장에 살았던듯하다.

계동 이공주家는 계동길을 따라 중앙고등학교 150m 이전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도달하며, 민자연화 오빠의 계동 별장 뒤에 산언덕이 있었고, 이 산언덕은 계산이다. 이공주家 진입로 맞은편인 계산 기슭에 집들이 연이어 있었고 계동길 따라 개천이 흘렸다. 계산보성학교는 1924년 5월 ‘계동 36번지’로 이전하여 학교명을 변경한다. 이후 1931년에 대동大東상업학교로 통합된다.(이동초, 『보국안민 발길로 서울을 걷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家를 내왕할 때면 계산의 대동상업학교와 그 전신인 계산보성학교를 접했을 것이다. 한때 모임 장소로 삼았던 민자연화 오빠의 계동 별장 터는 이공주家 진입로 맞은편인 옛 계산보성학교 산언덕 아래로 여겨진다. 1923년과 1933년 지도에도 이 일원에 집들이 나열해 있었다. 

공동연구자 방길튼·박혜현·윤지승

 

12월 26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