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태산대종사를 이렇게 만난다 - 일원상 서원문

편집자주 -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의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며 ‘일원의학’을 연구해 온 연산 김상수 박사가 일원상서원문을 풀어내며, 치유와 회복의 길로 이어지는 원리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원불교 교리가 현대 의학과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일원상 신앙이 미래 세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깊이 있게 제시하고자 한다. 일원상 서원문 연마에 앞서, 그가 품었던 두 가지 의두로 시작한다. 

2026-01-14     한울안신문

 

 첫 번째 의두, “왜 원불교를 새로 만드셨는가?
소태산 대종사의 <정전> <대종경>을 공부하면서 첫 번째 의두는 “왜 원불교를 새로 만드셨는가?”이었다. <대종경> 서품 공부를 하면서 선천시대 불법과 비교 분석해 보면, 우리 원불교인이 공부할 방향과 불교인이 공부할 방향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불교적인 공부가 큰 도(大道) 공부로 시작해서 이 세상(또는 저 세상)에 극락세계를 건설한다면(연역법적), 원불교인은 큰 회상 건설의 공부(도학과 과학의 병진, 공부와 사업이 병진하는 공부)로 시작해 그 결과로 큰 도를 자연히 이루게 되는 (귀납법적인) 공부법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인도(서역)로 삼장 법사와 손오공이 몇 년간을 고생하면서 불법을 구해 도(道)공부를 시작했다면, 우리 원불교인은 과학(정보화)의 기계를 이용해(시대화) 일상생활에서 직접 심신작용을 잘하고(생활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대중화) 공부를 시작해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대로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자연이 도를 이룰 수 있는 이치이지 않을까.
도(道)에는 소승, 대승의 구분이 있을 수 있지만 소태산 대종사의 큰 회상에는 소승, 대승을 초월해 있다. 주위의 성직자들이나 수행자들이 소승적인 수행이나 성리 공부에 치우쳐 본인은 환희에 차 있으나 현실에서는 큰 이익이 안 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본다. 소태산 대종사는 세상을 떠나서 법을 구하며 인도(the Way of humanity)를 여의고(seperating) 신통만 바란다면 이는 곧 사도(perverse path)라고 말씀하셨다. 
소태산 대종사는 회상을 건설하는 법으로 인도상 요법을 내놓으시면서, “나의 법은 인도상 요법(the essential principles of the Way of humanity)을 주체(core) 삼아 과거에 편벽된 법을 원만하게 하며 어려운 법을 쉽게 하여 누구나 바로(immediately) 대도에 들게 하는 법(<대종경> 수행품 41장)”이라고 말씀하셨다. 돈오(頓悟) 수행이다.
물론 <대종경> 서품 15장과 17장에서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부처님의 무상 대도는 한량없이 높고, 한량없이 깊고, 한량없이 넓으며, 그 지혜와 능력은 붓으로 다 성언하고 기록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기반해 소태산 대종사는 과거의 불교(서가모니)와 미래의 불교(소태산 대종사, 원불교)를 통찰케 하셨다. 우리 원불교인이 실행해야 할 공부 길로 사실적이고 반드시 성공하는 법(제10장 불공하는 법)을 밝혀 놓으신 것이다.
우리는 소태산 대종사의 인도상 요법(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을 실행해 대종사가 바라셨던 큰 회상(집집마다 부처가 사는)을 건설할 수 있도록 다시 재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큰 회상은 3차원, 4차원적 때로는 5차원적이며 물질을 제외하고 회상을 펼 수 없다. 큰 회상은 사람뿐 아니라 만 생령과 물질이 살아 움직이며 서로 돕는, 높은 지능(super-intelligence)의 유기체(organicsystem)적인 세상, 초연결-언어도단의 사회 (meta-communication)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대강령인 일원상과 삼학 팔조, 사은 사요를 큰 회상의 관점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두 번째 의두, 사은 사요
두 번째 의두는 사은 사요에 대한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선후천의 어느 성자도 사은에 대한 법문은 찾기 어렵다고 알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사은 사요를 넣으신 이유가 궁금했다. 더구나 기존의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하느님, 부처님 등으로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사은이 불공의 대상이고 신앙문이라고 하신 것은 쉽게 납득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정전>에서 사은 사요, 특히 사은을 제하고 보면 새 세상의 새로운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소태산 대종사가 이 세상을 분석하신 방식(없어서는 살 수 없는, 피은, indebtedness)대로 사은 사요가 없으면 우리 원불교가 존재할 수 있을까? 또 소태산 대종사가 바라는 큰 회상을 건설할 수 있을까? 사은의 피은사상이 없이 삼학만 가지고 원불교가 감사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큰 회상 건설에는 사은(만유, 물질) 사요가 신앙의 대상, 불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은에 대한 의문은 한두 개가 아니다. 우주 만유를 천지, 부모, 동포, 법률로 나누신 이유도 궁금하고, 여기에 ‘은(grace)’을 붙이고(개벽), ‘은’도 ‘피은’, ‘보은’, ‘배은’으로 구분해 놓은 것도 깊은 뜻이 있을 것 같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 후 “나의 도 얻는 것을 강연히 말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이라”라고 말씀하셨다(교사 제1편 제3장교법의 연원). 또 “장차 회상을 열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고, 모든 교법도 마땅한 바를 따라 응용하여,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라고 내정하셨다. 동양의 유·불·선 삼교와 서양 종교의 목표가 인간 중심의 천당, 극락, 자연 등 이었다면 이들 모두가 추구하는 이상 세계(스마트 세계, 미륵세계, 용화세계)가 소태산 대종사의 큰 회상이 아닐까.
소태산 대종사는 우리가(인간뿐 아니라 만물) 이 세상에 나타나고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relationship wherein we can not live without)”라는 대 명제를 앞세워 만유를 분류했고, 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는 말도 존재를 보존하고, 살 수 있나로 분석하여 ‘존재’와 ‘삶’으로 구분해 주셨다. 이를 바탕으로 피은(indebtedness)이 나오고 보은·배은의 법이 나오게 된 것이고, 이 모두는 ‘관계(relationship)’로 하나 되게 해 주셨다.

1월 16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