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은 가장 안전한 놀이터요, 완전한 배움터요, 온전한 삶터’

장차 우리가 원불교의 뿌리가 된다면  2세들은 기둥이 되고  3세들은 훌륭한 열매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원불교가 세상 속에서  이렇게 꽃 피워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6-04-15     한울안신문

저는 학창시절에 미션스쿨(기독여학교)에 다녔습니다. 원불교는 ‘원’자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첫 아이의 돌이 되던 해에 시아버지께서 열반하셨습니다. 시아주버님의 주선으로 49재를 원불교식으로 모셨습니다. 종재 후 형님의 연원으로 남편이 스스로 목포교당에 가서 입교를 했습니다. 남편의 권유로 2년 후에 목포교당에서 입교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연이어 아이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 키워놓고 나가겠단 말만 반복했을 뿐입니다. 그동안 남편은 정말 열심히 다니면서 자상하게 교당 소식들을 전해주었습니다. 
둘째 아이부터는 백일과 돌에 교구장님께서 축원 독경을 해주셔서 좋은 기운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객지라 모든 게 서툴고 외로운 사람에게 소속감과 지원군이 생겼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는 업고 둘은 걸리고 교당에 나갔더니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천방지축인 아이들 땜에 미안해서 계속 다니기는 힘들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께서 “아이들은 내가 봐줄 테니 데리고 와서 맘 놓고 법회를 보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단장님의 그 말씀이 남편의 백 마디 교화보다 약효가 컸습니다. 단장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뚜렷이 남았습니다. 나에게 복전을 찾아갈 길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원불교에 입문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목포교당 교도가 되면서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 가훈 전시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제출한 가훈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정한 가훈은 ‘정각정행(正覺正行)’이었습니다. 4대 강령 중에 하나였지만 우리는 그 무게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대로 해석해서 학교와 가정과 사회에서 ‘바르게 깨우쳐서 바르게 행동하자.’는 내용으로 정했습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매년 여름 방학이면 온 가족이 완도소남훈련원에 가서 대산종사님의 법문을 받들었던 일입니다. 아이들이 동백숲에서 뵈었던 할아버지 교무님을 잊지 않고 여름방학이 되면 소남훈련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또, 매년 여름방학이면 원불교학과 학생(예비교무님)들의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전거 행렬이 제주를 떠나 목포에 옵니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들은 아이들과 함께 모금함을 들고 차 없는 거리의 상가를 돌면서 모금 활동에 동참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창 원불교에 재미를 붙여 살다가 남편이 조도고등학교로 발령이 나서 낙도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당이 없어서 쓸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많이 허전해하고 있을 때 목포교구장이셨던 이타원 이정무 교무님과 이장선 교무님, 진도교당 김연희 교무님께서 위로 방문을 해주셨습니다. 친정 식구들이 온 것처럼 반가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그 인연으로 육지 나들이와 4축 2재 때마다 진도교당에 가서 법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교무님을 비롯한 교도님들이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주셨던지 지금도 그때의 고마운 마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진도에서 광주로 이사를 와서 농성교당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농성교당에는 이미 시댁 식구들이 다니고 계셨습니다. 이때부터 제 신앙심이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활발한 교화와 봉공 활동을 하는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구 여성회 부회장으로서 군 교화와 교도소 방문 법회를 주기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또, 소록도 봉사 활동, 부안 기름 유출 사건, 팽목항 여객선 침몰 사건 등 크고 작은 일이 터졌을 때마다 현장에 달려가서 봉사 활동을 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이때가 원불교 교도로서 정말 보람 있는 활동을 했다는 자부심이 컸던 시절입니다. 

원기106년(2021년)에 광주를 떠나 일산으로 와서 일산교당 교도가 되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딸네 식구들이 일산교당에 나와 함께 법회를 보고 있습니다. 교당 곳곳을 깨우고 어지럽히는 손자들이지만 우리에겐 이것도 자랑스럽습니다. 둘째 아이는 오랫동안 동경교당 교도입니다. 동경교당 법회가 끊어졌던 시기에는 손자들과 요코하마교당까지 먼 길을 다녔습니다. 작년 새로 문을 연 동경교당 건축위원장으로 어린이회장인 손자와 함께 2년 동안 8~90개의 부지와 건물을 찾아 다녔다는 일화를 교구장님께 들었을 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지금까지 좌선과 기도 생활을 빠짐없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루를 여는 새벽 시간에 마음을 모으는 일이 아이들의 성장과 집안의 발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우리 집에 오면 아이들도 불전도구를 장난감 삼아 놀기도 하고 제법 좌선도 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손자들에게 ‘감사 보은’과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생활신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올해 초 중앙총부 신년하례 법회에서 왕산종법사님께서 3대 참가자들에게 손수 염주를 선물하셨습니다. 가족 교화의 기본은 어려서부터 함께 법회 출석하는 것이란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장차 우리가 원불교의 뿌리가 된다면 우리의 2세들은 기둥이 되고 3세들은 훌륭한 열매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원불교가 세상 속에서 이렇게 꽃 피워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족 교화, 마음이 조급해져서는 안 됩니다. 강요하거나 맞서면 종교의 자유를 들고 나와 더 멀어질 뿐입니다. 늘 부모님들이 일심 정진하시면 그 자녀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믿으면서 사위와 며느리들도 스스로 함께 하는 날까지 기다렸습니다. 제 남편은 교당은 늘 ‘가장 안전한 놀이터요, 완전한 배움터요, 온전한 삶터’라고 역설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도님들이 다 함께 사은님의 품 안에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4월 17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