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의 방문처, 천도교중앙대교당

소태산 대종사는 대원정각大圓正覺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동경대전』의 ‘오유영부吾有靈符 기명선약其名仙藥 기형태극其形太極 우형궁궁又形弓弓’을 듣고 완연하게 그 뜻이 해석된다. 이어서 대각한 바를 대조해 보기 위해 여러 경전 중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도 열람한다. 또한 불법연구회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에서 고기를 싸온 종이가 『동경대전』이라는 걸 알고 이를 구해 보았고, 『용담유사』를 정산 송규에게 읽도록 하고 그 뜻을 새기면서 무릎을 치고 좋아하신다. 이처럼 소태산은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과 행적에 깊은 관심과 공감이 있었다.

2026-05-19     한울안신문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의 천도교대교당을 방문한다. 소태산은 상경하면 경성에서 나고 자라 이곳 지리에 밝은 김영신에게 길안내를 종종 맡기었다. 이날도 김영신을 앞세워 교동의 천도교당을 찾아 입실하여 심고를 올리고 “공자님은 제 묏등에 가서 절을 하고 최수운이 여기 와 앉았어도 모를 것이다.”라는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천도교당’은 경운동 88번지의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이르며, ‘교동校洞’은 경운동으로 고려시대의 향교가 있었기에 향교동 또는 교동이란 불리었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옛 지명이 되었다. 교동이란 명칭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 ‘교동초등학교’의 교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김영신은 원기14년(1929) 음력 10월 17일 불법연구회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에 부임하기 위해 이리역에서 3시에 출발한다.(〈월말통신〉 20호, 인사동정) 이후 원기15년(1930)까지 1년간 서기로 근무한다.(『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 권1, 김영신 교직연보) 
김영신의 경성출장소 근무 기록은 〈월말통신〉 19호 시창14년 음력 9월분 ‘경성교무 내정’에 “경성교무 김광선, 임원 김영신 임명. 내來 17일日 상경 부임 예정이더라.”라는 기록이 등장하고, 〈월말통신〉 30호 시창15년 음력 7월분에 경성교무 이공주와 김영신의 직무이행 성적조사가 기재되어 있으며, 〈월말통신〉 31호 시창15년 음력 8월분 ‘경성 근황’에 “요사이 창신동에는 삼매화 김영신 조전권 서대인 사씨四氏가 자미滋味있게 지나며 열심 공부하더라.”라는 기록이 보이며, 〈월말통신〉 33호 시창15년(1930) 음력 10월분 공고란 중 ‘법칙신정의 건’에 경성출장소 소속으로 등장한다. 이 기록이 경성출장소 소속으로 마지막이다. 이후 〈월보〉 제36호 시창17년(1932) 음력 5월분 ‘각지회합’의 익산총부에 등장한다. 
소태산의 천도교중앙대교당 방문은 김영신이 경성출장소 서기로 근무한 원기15년(1930)경으로 추정된다. 소태산은 경운동의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원기15년에 방문하고 원기16년(1931) 추석 이후에 수운 최제우의 득도와 포덕지인 용담정 및 수운의 태묘를 참배한다.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는 친일 활동하는 일부 동학 단체를 제외시키기 위해 1906년 교명을 동학에서 천도교로 바꾼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경운동에 1919년 7월 착공하여 1921년 2월에 준공된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처음 짓고자 했던 4백 평 규모가 허가 나지 않아 축소하여 지은 건물로 높고 웅장하며 이국적인 외관은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일제강점기 경성을 대표하는 3대 건축물로 꼽혔다. 대교당을 건축하는 명분하에 건축비를 3·1운동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용하여 공사가 늦어진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사용하여 색과 질감의 조화를 이루며, 지상 2층 중앙 탑부 4층의 바로크풍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지 1,827평, 건평 212평이다. 단층 구조로 중간에 기둥이 없이 천정을 철근 앵글로 엮고 지붕을 덮었다. 석재는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 인근의 채석장에서 가져왔다. 또한 이곳은 3·1독립운동의 중심지요 소파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운동이 싹튼 곳이다.(참고: 위키백과 및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운동 88번지 대지면적은 1912년(대정 원년) 12월 13일 사정査定할 때는 주변 대지를 합병하여 1,397평으로, 천도교대교당 완공 시 평수이다. 이후 1924년(대정 13년) 1,827평으로 확대되며, 1938년(소화 13년) 1824평으로 축소된다.(舊토지대장 참조)

융타원 김영신의 회고이다.
어느 날 종사주께서 불렀다.
“영신아 천도교당(천도교중앙대교당)에 가자”
그래서 교동(경운동)에 있는 천도교당에 갔다.
종사주께서 들어가시더니 
“심고하자”
눈을 감고 심고 드렸다.
이때 종사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공자님은 제 묏등에 가서 절을 하고 최수운이 여기 와 앉았어도 모를 것이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조송광 선생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종사주께서 조송광(불법연구회 2대 회장) 송벽조(정산·주산의 부친) 두 분이 회갑이 됐어도 공동생일 기념만 하고 지내는 게 안 되어,
“회갑 잔치를 크게 못해 주니 그 기념으로 어디 갑시다.”
세 분이 경주일대를 관광하러 갔다.(송벽조 선생은 못 갔다.) 
불국사 석굴암을 둘러보고 수운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을 찾았다. 
마침 사당을 지키는 수운 선생의 손자뻘 된다는 허연 백발노인이 반갑게 맞는다.
종사주께서 물었다.
“수운 선생께서 무슨 말씀 남기신 것 없습니까?”
없다는 것이었다.
묘소를 참배한 뒤 종사주께서 혼자 말을 하였다.
“내가 다시 몸을 받아 묏등에 와 절을 해도 날 알아볼 이 없을 것이다.” (『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소태산은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공자님은 제 묏등에 가서 절을 하고 최수운이 여기 와 앉았어도 모를 것이다.”라고 하였고, 경주 구미산 수운 묘소를 참배하면서 “내가 다시 몸을 받아 묏등에 와 절을 해도 날 알아볼 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소태산 대종사는 천도교대교당에 입실하여 ‘공자님은 제 묏등에 가서 절을 하고’라는 말씀으로 수운 최제우를 공자 사상의 창조적 계승자로 보신 것이다. 그리고 ‘최수운이 여기 와 앉았어도 모를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심고 드리고 있는 소태산 자신이 수운의 개벽 사상을 주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즉 소태산은 공자 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수운의 개벽 사상을 주체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말씀이다.
이는 공자와 수운과 소태산은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인 일원상 자리에서 본래 둘이 아니요 동원도리同源道理의 한 경지로서 개벽 사상을 잇고 있는 연원 관계를 밝힌 것이다.
경주 구미산의 수운 묘소에서 “내가 다시 몸을 받아 묏등에 와 절을 해도 날 알아볼 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소태산의 말씀도 같은 뜻이다.

김영신은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창신동회관’에서 출발하여 ‘동대문 전차정류장’에서 탑승하여 종로2정목의 ‘공원전’(현 탑골공원 앞)에서 하차한 후 도보로 10여 분 거리의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까지 안내하였을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경운동 천도교를 방문했을 때는 중앙대교당과 총부본관 그리고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 3채가 있었다.

1969년 수운회관 신축 때 백년기념관은 철거되고 총부본관은 우이동의 봉황각 경내로 이전한다.

천도교중앙대교당 맞은편 담장의 은행나무는 수령 180년 정도로 추정한다. 그러기에 천도교중앙대교당 준공(1921년 2월) 당시는 70여년 수령이며, 소태산 대종사가 방문했을 때(1930년)는 80여년 수령으로 소태산과 친견한 나무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 경운동의 천도교대교당을 방문한 다음해에 수운 최제우의 득도와 포덕의 현장인 경주 가덕리 용담정을 방문한다.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인 조송광 일대기인 『조옥정백년사』에 소태산과 함께 부산과 경주일대를 탐방한 기록이 있다. 시창16년(1931) 9월 추석을 지나 부산을 방문하고 10월에 범어사와 통도사를 탐방하며 이어서 경주 오릉과 불국사 석굴암을 탐방한 후 구미용담과 수운묘소를 참배한다.

『조옥정백년사』(조송광 저) 중 구미용담과 수운 묘소를 참배하기까지의 대목이다.
“(대구여관에서) 다시 조조早朝에 일어나서 법가를 배종하고 대구행 오전 5시 차로 10리 장정 내려가서 사평촌沙平村(금장역 추정)에 하차하고 맥반麥飯(보리밥)으로 요기하고 구미용담龜尾龍潭 물어보니 30여리라. 다행히 그 주인이 동행하여 초로석경草路石逕 촌촌전진寸寸前進 들어가니 백년 전 최사崔史를 문무처問無處라. 
심탄心嘆하던 차에 중간에서 최씨 족질되는 70 노웅의 집을 찾았다. 그 노인이 소점所點한 최사崔史를 일일 설명하는데 최선생 솔성率性과 공부와 고생과 취지와 활동함이 모두 우리 선생님과 흡사한 고로 자고自古 도덕 사업은 다 이러한가 의려疑慮하였다. 서로 작별하고 다시 구미 용담 찾아가니 무매경로초소소無媒經路草簫簫라 인적은 바이없고 창천만 보이는데 수음樹陰은 은은하고 윤수潤水는 잔잔하다. 송림을 부여잡고 한 곳을 당도하니 유벽 산중 개벽되어 석교를 건너가니 좌편은 석벽이요 전면은 폭포라 삼간 와옥瓦屋 지었는데 풍우를 못 이겨 실혼失魂한 듯 적막하다.
어언간 오정이과午正已過라. 책속册束 과실 내어 3인이 나눠 먹고 종사님은 상계上溪로 가서 청수 한 줌 쥐어 자시고 “이분은 이렇게 놀았구나” 한번 대소大笑하시고, 오직 나는 중계中溪에서 청수 한줌 쥐어 먹고 기념 차로 괴석 3개 책속册束에 넣고 다시 회정回程하여, 최선생 묘소를 가보니, 장하다 시천교侍天敎여! 그 심곡深谷에 그 체석體石 들여 정정법식正正法式으로 한 손에 경전을 들고 또 한 손에 염주를 들고, 머리에 정관正冠을 높이 쓰고 남향으로 단정하게 세웠는데, 뒤에는 놀던 용담정이요 앞에는 탄생한 가정리柯丁里라.”(『조옥정백년사』)

『구도역정기』의 김영신 회고에 따르면 조송광은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수운 묘소를 찾다가 수운의 사당을 지키는 수운 선생의 손자뻘 되는 허연 백발노인을 만났다고 한다. 『대종사 일화』(손정윤 저)에서도 ‘최수운의 사당을 지키고 있는 한 노인’이라고 특정한다. 다만 조송광의 자서전인 『조옥정백년사』에는 “최씨 족질 되는 칠십 노인의 집을 찾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수운 사당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수운의 조카뻘 되는 최씨 노인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또한 『조옥정백년사』에는 소태산이 수운의 후신後身이라는 이야기(구전)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태산이 수운의 후신이라는 수운 갱생설이 등장하는 『대종사 일화』(손정윤 저)에서도 소태산은 수운의 생애를 들려주며 소태산을 수운의 후신으로 여기는 최수운의 조카뻘 되는 노옹에게 “노인 어른,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시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입니다. 수십 년간 간절히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도록 하십시오. 할아버지의 색신은 이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으나, 그 정신만은 이 민족과 더불어 오래오래 살아 있을 것입니다. 노인 어른이 만약 할아버지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살아간다면 노인 어른은 항상 할아버지를 모시고 뵙는 것이 됩니다.”라고 수운 갱생설의 본의를 일러주고 있다.

이러한 수운의 갱생설更生說은 동학 신자로서 소태산 문하에 입문한 최수인화崔修仁華를 통해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최수인화는 여러 대의 동학 신자로 우연히 발심하여 입교하였더니 하루는 대종사께 여쭙기를 “저는 동학을 신앙하올 때 늘 수운 선생의 갱생을 믿고 기다렸삽던바, 대종사를 한 번 뵈오니 곧 그 어른을 뵈옵는 것 같사와 더욱 정의가 두터워지고 기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나이다.” 하거늘, 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성현들은 심신의 거래를 자유 자재하시는지라 일의 순서를 따라 나신 국토에 다시 나기도 하고 동양에나 서양에 임의로 수생하여 조금도 구애를 받지 아니하시나니라. 과거에도 이 나라에 무등無等한 도인이 많이 나셨지마는 이후로도 무등한 도인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전무후무한 도덕 회상을 마련할 것이니, 그대는 나를 믿을 때에 나의 도덕을 보고 믿을지언정 어디에 의지하는 마음으로 믿지는 말라.”(『대종경』 변의품 30장)
소태산은 성현이란 거래를 자유하기에 수생을 임의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갱생설을 맹목적으로 믿기 보다는 성현이 깨달은 진리에 근원하여 제정한 교법(도덕)을 믿고 실행하는 것이 본의라고 강조한다. 

소태산은 수운의 ‘다시 개벽’과 증산의 ‘천지공사’를 계승하여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고 천명한다. 즉 물질개벽을 선용善用하는 정신개벽을 주장한다. 
이러한 개벽의 계승 관계에 관한 제자들의 주장이다.

김기천이 여쭙기를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한다면 수운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 선생의 행적은 그 다음 소식을 알리신 것이요, 대종사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럴듯하니라.” 이호춘이 다시 여쭙기를 “그 일을 또한 일년 농사에 비유한다면 수운 선생은 해동이 되니 농사 지을 준비를 하라 하신 것이요, 증산 선생은 농력農曆의 절후를 일러 주신 것이요, 대종사께서는 직접으로 농사법을 지도하신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또한 그럴듯하니라.”(『대종경』 변의품 32장)

개벽 사상이 수운을 시작으로 증산으로 이어지고 소태산에 의해 펼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수운의 개벽의 외침이 해월을 통해 더욱 민초들에게 스며들었고, 동학농민이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몰살당하는 동학농민전쟁 시 증산은 천지공사의 개벽을 통해 민초들의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품게 하였고, 소태산은 물질문명시대에 정신개벽의 미래 문명으로 확대한 것이다.

종합하면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인 일원상 자리로 보면 소태산 대종사와 수운 선생은 간격이 없는 하나의 성품 자리에 만나며, 개벽 사상의 계승자로서 서로 한마음으로 통하면서 또한 소태산의 일원대도를 통해서 앞 성자들을 존중하고 추존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소태산은 “그 분들은 미래 도인들을 많이 도았으니 그 뒷 도인들은 먼젓 도인들을 많이 추존하리라”(『대종경』 변의품 32장)라고 강조한다.

원불교 서울성적지연구회 방길튼·박혜현·윤지승 공동연구

5월 22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