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열다섯 품의 첫 장을 공부하다

“당연한 길을 떳떳하게!”  제4 인도품

2026-06-02     한울안신문

『대종경』「인도품」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밟아가야 할 길, 인륜 도덕에 대한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새로 입교한 교도 한 사람이 여쭙기를 [저는 마침 계룡산(鷄龍山) 안에 살고 있사와, 산 안에 있는 여러 교회의 인물들과 많이 담화하게 되옵는바, 그들이 항상 각자의 교리를 자랑하며 말마다 도덕을 일컬으오나, 아직도 그 뜻에 밝은 해답을 듣지 못하였사오니 대종사께서 그 도덕의 뜻을 가르쳐 주옵소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이제 도덕을 알고자 하니 그 마음이 기특하나 도덕이라 하면 그 범위가 심히 넓어서 짧은 시간에 가히 다 설명할 수 없나니라. 그러므로, 그대가 이 공부를 시작하여 상당한 훈련을 받은 후에야 점차로 알게 될 것이나, 이제 그 궁금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우선 도덕의 제목만을 대강 해석해 줄 터이니 자세히 들으라.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대종사님은 ‘도덕의 제목만 대강 해석’하겠다고 양해를 구합니다. ‘이 공부를 시작하여 상당한 훈련을 받은 후에야 점차로 알게 될 것’이라는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공부의 기간이 짧은 질문자의 공부 정도를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예컨대, 피아노 연주를 오래 해봐야 비로소 피아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몇 마디 말로 설명해야 하는 대종사님의 난처함을 공감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무릇, 도(道)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곧 길을 이름이요, 길이라 함은 무엇이든지 떳떳이 행하는 것을 이름이니, 그러므로 하늘이 행하는 것을 천도(天道)라 하고, 땅이 행하는 것을 지도(地道)라 하고, 사람이 행하는 것을 인도(人道)라 하는 것이며, 인도 가운데에도 또한 육신이 행하는 길과 정신이 행하는 길 두 가지가 있으니, 이 도의 이치가 근본은 비록 하나이나 그 조목은 심히 많아서 가히 수로써 헤아리지 못 하나니라. 
대종사님은 주로 ‘인도(人道)’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일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원불교 교전』곳곳에서는 ‘인도 정의의 공정한 법칙’이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도(道)’란 ‘길’이고, ‘떳떳이 행하는 것’이라고 쉽게 설하셨습니다. ‘천도(天道)’, ‘지도(地道)’에도 ‘떳떳함’이 적용되겠지만 ‘떳떳함’은 아무래도 ‘인도(人道)’에 더 잘 어울리는 설명입니다.
인도에 어긋나면 떳떳하지 못하고, 인도에 부합하면 떳떳할 것이니 ‘떳떳함’은 인간의 마음 즉 마음공부에 달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떳떳이’라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하신 대종사님의 의도를 깊이 헤아려봐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가지 도 가운데에 우선 인도 하나만 들어 말하여도, 저 육신이 행하는 도로의 선(線)이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큰길 작은 길이 서로 연락하여 산과 물과 들과 마을에 천만 갈래로 뻗어나간 수가 한이 없는 것같이, 정신이 행하는 법의 길도 어느 세상을 막론하고 큰 도와 작은 도가 서로 병진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에 경계를 따라 나타나서 그 수가 실로 한이 없나니라. 
인도를 다시 둘로 나누어 예시하십니다. ‘육신의 행하는 도로’와 ‘정신이 행하는 법의 길’로. 특히 ‘정신의 길’은 ‘경계를 따라 나타나서 그 수가 실로 한이 없다’고 하시니, 천만 경계마다 행해야 할 인도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 길들을 제대로 밟으려면 우리의 공부가 매우 깊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몇 가지 예를 들면 부모·자녀 사이에는 부모·자녀의 행할 바 길이 있고, 상·하 사이에는 상·하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부부 사이에는 부부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붕우 사이에는 붕우의 행할 바 길이 있고, 동포 사이에는 동포의 행할 바 길이 있으며, 그와 같이 사사물물을 접응할 때마다 각각 당연한 길이 있나니, 
천만 경계 중에서도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행할 바 길’을 예시해주십니다. 그리고 ‘떳떳이 행하는 것’인 ‘도(道)’를 ‘당연한 길’로 바꿔서 설하십니다. ‘떳떳함’이 주관적 기준이라면, ‘당연함’은 객관적 기준의 표현 같습니다. 
‘사사물물을 접응할 때마다 각각 당연한 길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천만 경계에 ‘응’해서 ‘심신작용’을 할 때마다 지켜야 할 ‘당연한 길’이 있는 것이고 이 ‘길’을 ‘떳떳이’ 행하는 것이 ‘인도’를 제대로 밟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오직 이 당연한 길을 아는 사람은 곧 도를 아는 사람이요, 당연한 길을 모르는 사람은 곧 도를 모르는 사람이며, 
흔히 ‘도를 안다’, ‘도를 깨달았다’, ‘도를 통했다’라고 하려면 ‘오직 이 당연한 길’을 알고, 깨닫고, 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 당연한 길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이를 알면서도 외면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 제일 큰 도로 말하면 곧 우리의 본래 성품인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도이니, 이는 만법을 통일하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여기에 근본하였으므로 이 도를 아는 사람은 가장 큰 도를 알았다 하나니라.]
‘우리의 본래 성품인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도’란 소태산 대종사님의 깨달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가장 큰 도’를 알아야 ‘도를 깨달았다’라고 할 수 있고 그래야 ‘사사물물을 접응할 때마다’ 가야 할 ‘각각 당연한 길’을 찾아서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만 경계에 응해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할 수 있고,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땅한 길을 가면 개인에게는 복락을 얻는 동시에 진급된 삶이 열리고 일체 중생에게는 ‘광대무량한 낙원’이 펼쳐질 것입니다.

최정풍 교무 소태산마음학교, 원남교당

6월 5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