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돌아가는 그 자리

수행이란 변화를 떠나 불변의 정수를 캐내는 일이 아니라  유와 무가 돌아가는 이 생활 한가운데서 구애됨 없이 사는 일

2026-07-01     한울안신문

얼마 전 데뷔 20년을 맞은 한 대중음악가가 새 앨범을 발표했다. 앨범의 이름은 ‘퀸테센스(Quintessence)’였다. 그는 새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1년여의 준비 기간 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단어가 ‘본질’, ‘정수’였다고 밝혔다. 다만 그가 말하는 정수는 도달해 멈추는 어떤 결론이 아니라, 여전히 묻고 찾아가는 과정 자체였다. 오래 활동한 이가 정답을 내놓기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는 것, 이 자세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서양 중세 철학에는 ‘퀸테센스(quintessence)’라는 말이 있다. 라틴어로 ‘다섯 번째 본질’이라는 뜻이다. 세상은 흙·물·불·공기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으나 변하고 소멸한다고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별과 천체만은 영원히 변치 않는 다섯 번째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이 불변의 정수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훗날 연금술로 이어졌다. 비금속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걸러내어, 마지막에 남는 순수한 한 방울, 그것이 정수였다. 이 사고방식의 핵심은 ‘분리’다. 변화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나누고, 후자를 향해 전자를 덜어낸다. 
<정전> 일원상장의 마지막, 우리 교법의 정수라 불리는 게송과 비교하여 생각해보았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게송이 가리키는 정수는 무언가를 걸러낸 마지막 알갱이가 아니다. 유와 무가 끝없이 자리를 바꾸며 도는 그 순환 자체, 그리고 그 돎이 다다른 텅 빈 자리(구공)가 다시 가득함(구족)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련해서 남긴 한 점이 아니라, 돌고 도는 움직임 자체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도 종종 퀸테센스의 길을 걷는다. 번잡한 일상을 떠나야 진짜 공부가 된다고 여기고, 괴로움과 기쁨 가운데 어느 한쪽만 붙들고 다른 쪽은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게송은 묻는다. 정수는 일상을 떠난 곳에 따로 있는가, 아니면 일상이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돌아가는 그 자리에 이미 있는가.
성리대전 법문 속 혼돈(渾沌)의 우화도 같은 이치를 다른 말로 전한다. 좋은 뜻으로 뚫어준 일곱 구멍이 혼돈을 죽였다. 본성은 외부에서 강제로 걸러내야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폐하고 규제할 때 온전히 보존된다. 
일원상 법어가 눈, 귀, 코, 입, 몸, 마음 하나하나를 짚어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하다’ 하신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 하나를 정수로 따로 추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쓰는 그 모든 자리가 이미 원만하다 하신 것이다. 그러니 수행이란 변화를 떠나 불변의 정수를 캐내는 일이 아니라, 유와 무가 돌아가는 이 생활 한가운데서 구애됨 없이 사는 일일 것이다. 오늘 내가 겪는 유무의 순환, 그 유무의 순환의 세계를 계속 사는 것 자체가 이미 구족이기 때문이다.
 

7월 3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