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에서 만난 하이데거와 소태산

교무님의 법문에서 출발해 의문점을 정리해보니 균형 있는 영양 섭취를 분석하는 과학과 존재의 근원을 사유하는 도학이 병진돼야 한다는, 육신의 건강과 정신적 깨달음의 추구가 함께해야 한다는 소태산 사상이 더욱 크고 넓게 느껴진다. 생활시불법 불법시생활이라는 가르침 또한 여기에 해당하리라 믿는다.

2026-07-14     한울안신문

일요일, 바쁜 일정 탓에 법회에 못 가고 밴드를 통해 법문을 들었다. 신입교도 2년 차로 매일 저녁 하루를 마무리하며 교전 사경과 염불 일기정진을 함께 해나가니 처음엔 담담하기만 했던 교무님의 법문이 요즘은 다르게 들린다. 원불교 법위등급에 대해 설명하시던 교무님은 흔히 식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단백질이 없다”고 돌려 말한다며, “보통급 계문 1조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를 대부분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간접살생에 해당한다”고 하셨다. 오늘따라 교감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아 두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첫째는 나도 평소 밥상에 “단백질이 있다, 혹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되도록이면 단백질과 탄수화물, 비타민(채소)이 균형 잡힌 식단을 준비하거나 그렇게 먹으려고 노력해 왔다. 학교에서 동물을 주로 식용가능한 식품군과 영양소로 배웠기 때문인데, 오늘 문득 ‘고기=단백질’이라는 표현과 인식이 ‘우리와 같은 불성을 지닌 생명체의 살점’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상추에 싸 먹고, 식당에서 우거지갈비탕을 먹으면서 ‘남의 살’이 아닌 ‘단백질’과 비타민을 먹는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점심을 먹으며 아들에게 이야기하니 홍대 거리에서 기인을 만나 큰 닭을 팔에 얹어 본 일이 있다며 당시 사진을 보여주었다. 가늘지만 엄청나게 단단한 닭의 발이 자신의 팔을 그러잡고 지탱했던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 그 이후로는 닭발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아들은 ‘후라이드 치킨’의 전 단계가 아닌 대등한 생명체로서의 닭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닭=치킨’도 ‘단백질’ 못지않게 생명에 대한 경외를 은폐하는 표현이어서,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있어 인간이 다른 생명체를 매대에 진열돼 있거나 언제든 배달앱으로 주문하는 식품으로만 접하게 된 것은 기술시대, 즉 물질이 개벽된 시대의 특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했다는 것조차 망각함으로써 생각 자체가 납작해지고 획일화되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인데, 우리가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근대과학이 인간과 자연을 대상화·도구화·자원화할 뿐 그 이면에 있는 생명의 근원적 의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를 들어 근대물리학이 시간과 공간, 운동을 다루지만 시간·공간·운동이 각각 무엇인지 사유하는 것은 물리학의 영역이 아님을 지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의학 또한 인체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기술이 있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유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사유’란 존재를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함(Denken)은 곧 감사함(Danken)이며 따라서 사유하지 않음, ‘무사유’야말로 존재의 베풀어줌에 대한 가장 큰 배은망덕이 된다고 했다. 인간의 사유야말로 사은을 깨닫는 훌륭한 길인 것이다. 우리가 근대과학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어 천지의 다른 존재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는 나의 근원을 깊이 ‘사유’하지 않는다면 이게 바로 천지에 대한 ‘배은’이 아닐까.

둘째 보통급 계문 1조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와 관련해 육식 자체가 간접살생에 해당한다는 말씀도 생각해볼 부분이 있었다. 승려의 육식 금지령은 양나라 무제가 처음 만들었는데(511년), 철저한 무소유로 걸식에 의존했던 초기 인도의 교단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규모 있는 사찰 경제를 운영했기에 육식이 곧 살생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는 게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는 누구나 채식주의자가 되어 간접살생을 피해야만 할까? 법마상전급 계문 3조 “연고 없이 사육(四肉)을 먹지 말며”는 왜 부분적으로 육식을 허용하고 있을까?

출가수행자가 아니면서도 자발적으로 채식주의를 선택하거나 모피 등 동물가죽 사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좁은 공장식 축산과 잔인한 방식의 도축, 산채로 가죽을 벗기고 털을 뽑는 아비규환의 사태를 일부라도 알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다. 평범한 양심을 가졌다면 누구도 그 실상을 알고는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할 텐데, 그럴듯한 영양성분이나 식품명, 패션을 덧씌워 우리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일체의 ‘영성’을 망각한 채 거대자본의 기획에 따라 오늘도 성실하게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아도 커다란 정신개벽에 해당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불교에 연원을 둔 회상을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반도 후천개벽사상을 계승했고, 그래서 원불교 교리는 불교사상만으로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삼경(경천·경인·경물)사상을 설파한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천식천(以天食天)’은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는 뜻이다. 인간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 사물까지도 ‘하느님을 모신(侍天主)’ 존재이므로 다른 존재를 먹고 사용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하늘인 내가 하늘을 먹는 것’이기에 공경과 감사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의 생명을 먹은 만큼 그에 값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동포에 대한 ‘보은’이며,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사용하는 지혜야말로 물질개벽 시대에 요구되는 자리이타의 보살행이 아닐 수 없다.

교무님의 법문에서 출발해 의문점을 정리해보니 균형 있는 영양 섭취를 분석하는 과학과 존재의 근원을 사유하는 도학이 병진돼야 한다는, 육신의 건강과 정신적 깨달음의 추구가 함께해야 한다는 소태산 사상이 더욱 크고 넓게 느껴진다. 생활시불법 불법시생활이라는 가르침 또한 여기에 해당하리라 믿는다.

이보현 교도 종로교당, 백낙청TV 구성작가 

7월 17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