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연구회창건사 (佛法硏究會創建史 회보 44호)

2026-10-13     한울안신문

 

대종사께서 임시 월명암에 머무시며(유숙 留宿) 주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써서 영광 단원에게 보내시다. 때에 전주 김제 등지에 거주하던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이 대종사의 소식을 탐지하고, 곧 달려와서 슬하에 직접 모시기를(친시 親侍) 자원(自願)하는지라. 이에 12월경에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뒤 산기슭(후록 後麓)에, 수간 초옥(草屋 초가집)을 매수하여 위치를 정하시고, 몇몇(수삼 數三) 제자로 더불어 간고(艱苦)한 처음 살림을 시작하시다.

<시창 5년 (경신 庚申)>
대종사께서 실상 초옥(草屋 초가집)에 계시며 당분간 수양(修養)에 전력하시더니, 때에 영광, 김제, 전주 등지에 거주하는 신자 등이 은연중 서로 소식을 통하여 그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방문하는 인원이 차차 계속되는지라. 대종사께서 일변(一邊)은 여러 사람의 출입이 너무 다번(多煩)할까 염려하셨으나, 일변(一邊)은 또한 그 사람들의 정성에 감응(感應)하사 매양 흔연(欣然) 영접(迎接)하시어 조석(朝夕)으로 강법론도(講法論道)함을 게을리 아니하시니 일반 신자 등은 심신(心身)이 더욱 상쾌(爽快)하여 험로(險路) 내왕(來往)에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아니하며, 가까이 모시는(근시 近侍) 제자들은 낮에는 산전(山田)을 개척하여 생활의 자료를 삼고, 밤이 되면 또한 법석에 참예하여 청법락도(聽法樂道 법설을 받드는 즐거움)로써 재미를 삼았으니, 당시의 법설 요지는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방법을 많이 설하시었다. 3월에 회성곡(回性曲)이라는 소설 상·중·하편을 지으셨으나, 이도 또한 사람을 교화하는 정식 교과서가 아니라하여 그 뒤 드디어 전하지 아니하였다 한다.

4월에 대종사께서 처음으로 본회 교리강령(교강 敎綱)을 발표하시니,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인 바, 사은(四恩)은 천지(天地)·부모(父母)·동포(同胞)·법률(法律)의 피은(被恩) 보은(報恩) 배은(背恩)을 말씀한 것이요, 사요(四要)는 남녀권리동일(男女權利同一), 지우차별(智愚差別), 무자녀자타자녀교양(無子女者他子女敎養), 공도헌신자이부사지(公道獻身者以父事之)를 말씀한 것이니, 이는 곧 인생의 마땅히 행할 도로써 세상을 구원할 요법이 되고, 삼강령(三綱嶺)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戒)·정(定)·혜(慧)를 단련하기 위하여 정신수양(精神修養)·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를 말씀한 것이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써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八條目)은 신(信)·분(忿)·의(疑)·성(誠) 4조로써 진행력(進行力)을 삼고 불신(不信)·탐욕(貪慾)·나(懶)·우(愚)로써 사연건(捨捐件)을 하나니, 이는 곧 삼강령 공부를 운동하는 요법이 되는바, 그 강령이 심히 간명하고 교의(敎義)가 심히 원만하여 일반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迷惑)과 편벽(偏僻)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본 회의 처음 정하신 교법(원정교법 元定敎法)이시라, 그리하여 4월 이후(이강 以降)로는 모든 신자에 대하여 교화 방식이 먼저 이 교강(敎綱) 이해로써 공부의 주력을 삼게 하시다. 이때에 대종사께서 밖으로 승려를 교제하사 재래 사원의 모든 법도를 하나하나(일일 一一) 청취하시고 안으로 몇몇 제자로 더불어 본 회의 모든 교과서 초안에 매우 바쁘시니(분망 奔忙), 『조선불교혁신론』과『수양연구요론』등이 차례로 초안되었다.
(주註) 『조선불교혁신론』은 재래 조선불교를 시대에 적응하여 대중교화(大衆敎化)를 의미한 것이요, 『수양연구요론』은 수양(修養) 전문의 방식과 각(各) 항(項) 연구(硏究) 조목(條目)을 지정하여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의 실제를(실경 實境) 밟게 하는 경전(經傳)이다.

<시창 6년(신유  辛酉)>
대종사께서 실상에 머무르신(주가 住駕)지 수년에, 신도의 내왕이 더욱 빈번해지고 거처하신 주택은 너무나 협착하여 운용상 심히 불편을 느끼고 있더니, 7월경에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써 수간정사(數間精舍)를 그 대상(臺上)에 신축할 때, 송적벽은 바닥기초(기평 基平)와 축대(築臺)를 담임(擔任)하고 김남천은 목역(木役 목수)을 담임(擔任)하여 고단한 힘으로써 근근히 성조(成造)를 진행하던 중, 월명암 주지 백학명 화상은 뜻하지 않은 가재목(家材木)을 보조하였고, 그 외에도 각지 신도의 약간 후원이 있었던 바, 동년 9월경에 이르러 이에 공사를 마치다(필역 畢役).

김선명 영광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