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교당

신앙심으로 장애아들 남부럽지 않게 키운 ...박정의행 교도

2004-11-06     .
“내 생애 가장 기뻤던 날은 아들 최민(법명 최도진)이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였죠.”
나이 스물 일곱에 낳은 첫아들이 생후 10달 만에 소아마비를 앓고 후유증으로 손발을 꼼짝할 수 없었을 때, 박정의행 교도는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 갓난아기적엔 하루 세끼 밥 먹이는데 9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조금 커서는 등하교 시키는 것도 큰일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부터 단 하루도 결석하려 하지 않았다는 큰 아들 최민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농활이며 학생운동, MT, 시위까지 남들 하는 것은 다 하고 다녔다. 80년대 학생운동권 핵심이론가였던 최씨는 조직 사건으로 구속된 적도 있다. “백성이 으뜸이라는 생각에 백성 민(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으니 끝까지 뒷바라지 할 밖에요” 박정의행 교도는 아들이 경찰에 쫓겨 다닐 때도 틈만 나면 기도를 했다. 집에 놀러온 아들 친구들은 “엄마가 저렇게 기도드리니까 민이가 맘 편히 지내나보다”고 했다고.
현재 최씨는 직원중 1"3이 장애인인 정보통신업체 ‘OPEN S.E(사회적 기업)’ 사장이다. 3년 전엔 장애인운동을 하는 사회복지사와 결혼, 1남 2녀의 다복한 가정도 꾸렸다.
“대호법을 많이 배출하고 연원교당을 20여개나 낸 종로교당에 다닌 것이 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지요” 그녀는 “내 가정, 내 집만을 벗어나 울을 트고 세계 인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김이현 교무의 가르침을 따랐고 “남들 찬밥 먹을 때 너도 찬밥 먹어야 한다”며 아들이 감옥에 있을 때도 잦은 면회를 자제했고, 면회 가서도 다른 엄마들처럼 눈물 흘리지 않았다. 또 “물질은 소용없고 올바른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들 셋을 모두 유학시켜 며느리들까지 박사학위를 받게 했다.
74년 남편(법명 최홍신)이 중동건설현장으로 13년 간 해외파견근무를 나갔을 땐 “남편이 군대 갔다” 생각하고 살았단다. “돈까지 벌어다주니 얼마나 좋냐” 면서 막내까지 대학에 보내고 나서야 남편은 돌아왔다. 박 교도는 오히려 남편의 부재를 공부할 기회로 삼아 5시 반이면 일어나 새벽기도를 다녔고 틈나는 대로 참회문을 외우며 스스로를 반조했다. “해외에 나갈 일이 있어도 꼭 교당에는 들렀다”는 그녀는 처음 월초기도 드릴 때 천원 냈던 기도비를 매달 천원씩 올려 지금은 2십9만9천원을 내고 있다.
“가족교화가 최우선”이라 믿는 그녀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당에 데리고 다녔다. 덕분에 세 아들 모두 학생회활동도 열심히 했던 일원가족이다. 지금도 큰아들 최도진은 교당에 나오고 싶어 하는데, 종로교당에 장애인을 위한 전용승강기나 램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못 나오고 있다. 바쁜 아들 대신 4살짜리 손녀딸을 데리고 나온다는 박 교도는 지금 살고 있는 4층집에 세 아들 내외 모두 데리고 살 계획이고, 조만간 온가족 손을 잡고 교당에 다니고 싶다고.
서원정 기자 swon@wo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