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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이 만난 사람
한울안이 만난 사람_성담 김정명 소목조각장
[한울안이 만난 사람] 나의 스승은 한국전통문화와 무명의 혼
2021. 02. 23 by 강법진 편집장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이 ‘목수’였던 그는 처음 조각도를 잡은 그 날의 느낌을 잊은 적이 없다. 좋은 목재만을 골라 틀을 짜고 한국전통문양을 새겨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초심은 여여(如如)하다. 그렇게 소목조각장으로 40년 외길을 걸어왔다. 한국전승공예대전 대상,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상, 대한민국 동탑산업훈장 수상, 중요무형문화재 108호 목조각장 전수자로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명장’이란 타이틀에는 욕심이 없다. 이름만 빛난 명장보다는 본질을 잃지 않는 원목 그대로의 ‘목수 결’을 지키고 싶어서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숭덕문화원 원장 ‘성담 김정명(盛潭 金正明·58) 목공예가’를 지난 2월 7일 만났다. 현대목공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목양 박성삼(1907~1987) 선생의 제자이며, 국내 유일의 소목조각장인 그는 “나의 스승은 한국전통문화와 무명으로 살다간 작가들의 혼”이라고 말한다.
 

성담 김정명 소목조각장은 전통 목가구부터 다도용품, 서예용품, 궁도용품, 생활가구까지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나의 스승, 한국전통문화

9남매의 막내. 소위 세상에 나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할 뻔했던 그를 이모의 선택으로 세상에 발을 딛게 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과 조각에 소질을 보였다. 친구의 권유로 일찍부터 ‘목수’의 길에 들어선 그는 남들이 7년에 걸려 배우는 과정을 2년 만에 마스터할 정도로 천생 목수였다. 유난히 손재주와 그림 실력이 뛰어난 그는 동년배보다 월등하다는 이유로 시기질투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불 꺼진 작업실에 홀로 남아 나무를 깎고 도안을 그렸던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나에게 있어 스승은 우리나라 전통문화다. 인간적으로 나를 지탱해 줄 만한 스승은 없었다. 오히려 무명으로 살다간 선조들의 유물과 유작들, 우리나라 대표 보물이나 국보가 나를 키운 스승이었다. 한국에서는 소목조각장이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이 안 된다. 지금까지도 국내에는 목양 선생과 나 외에는 소목장과 목조각장을 함께 갖춘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힘든 작업이고 오랜 노력이 필요한 분야”라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명장’ 타이틀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그는 그런 것도 걸치지 않는다. 예술과 산업의 미묘한 교차점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한 치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만일 백 세 인생을 살게 된다면 나이 아흔쯤 ‘옹(翁)’이라는 칭호는 하나 달고 싶다는 그.

“이름 없이 살다간 뭇 선조들의 예술혼이 내 작품에 영감을 주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목공예문화를 살찌운다면 나는 당당히 그 산파 역할을 할 것이다.”

오랜 세월 작품활동에만 전념했던 그가 몇 년 전부터 목아박물관 박찬수 관장(중요무형문화재 목조각장)의 제안으로 후진양성에 눈을 뜨게 된 것도 한국전통문화를 계승하고자 목적이었다.


종교와 예술

그의 작품은 웅장하면서도 위트가 있고, 세밀하면서도 견고하다. 서른일곱 살에 제작했다는 8폭 병풍 ‘무릉선경’은 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경(도가)에 들어선 주인공이 시간의 구름을 타고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노니기도 하고, 선악을 심판하기도 하고, 어린아이처럼 즐기기도 하는 모습에서 그의 창작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홀연히 떠오르는 생각을 그림으로 옮기면 모든 것이 작품이 되는 그의 손끝이 어디 한두 해 지샌 밤의 결과였을까.

많게는 조각도 400자루가 걸린 적도 있었다는 그의 작업실 입구에는 세월의 흔적인지 군데군데 빈 곳이 많다. 이유인 즉, “제자들이 달라고 하면 안 줄 수 있나. 하나둘 주고 나니 이것 남았다”며 웃음을 보인다.

코로나19로 지금은 교육장이 쉬고 있지만 2019년까지는 작품활동을 줄여서라도 후진양성에 더 매진했다는 그. 목조조각장으로서 한국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신념이 대를 잇지 않으면 그마저도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다. 또 하나는 아무리 훌륭한 장인이라도 교육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대중의 문화와 예술로 그 기능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그는 원불교 문화 계승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종교는 문화와 예술로써 대중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원불교는 예술성이 너무 빈약하다. 교육시스템 안에 문화를 녹여내면 예술은 따라온다. 특히 한국의 자생종교이기 때문에 한국문화를 예술로 잘 담아낼 필요가 있다.”
 


원불교와의 인연

생활한복을 즐겨 입어서인지 그는 원불교가 낯설지 않았다. 몇 년 전 자곡동 원불교 강남교당이 신축봉불을 할 때, 영모전 위패를 제작하면서 원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때 한덕천 서울교구장(당시 강남교당 교무)이 소태산 대종사 십상 제작을 처음으로 언급해 그의 마음속에는 늘 품고 있는 바람이었다. 당시는 강남교당 위치가 십상 제작에는 공간이 넉넉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다시금 원불교소태산기념관 서울교구청 자리에 ‘소태산 대종사 십상’ 작품이 의뢰 들어와 가슴에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붓을 들고, 무장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는 말처럼, 목수도 그렇다. 자신을 보석 같이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혼신의 작품을 빚어낸다. 내 인생의 가장 귀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그가 이처럼 귀한 인연이라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원불교소태산기념관에 처음 들어선 그는 건물 이름과 달리 성자를 상징할 만한 아무런 상징물도 전시공간도 없다는 데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년간 여러 작품을 통해 만난 종교, 그리고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유구히 흘러 내려온 ‘하나의 큰 줄기’라는 게 지금까지의 확신이다.

이를 ‘성자의 일대기’로 표현한다는 게 설레면서도 기대가 크다. 십상 중에 어느 부분이 가장 어렵냐고 묻자, 어린 진섭(소태산 대종사의 아명)이가 하늘을 보고 의문을 품었던 첫 번째 ‘관천기의상(觀天起疑相)’이라고 한다.

어린 진섭이의 마음과 그가 동화될 때쯤, 다시 그를 찾아야겠다.

2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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